영암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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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이야기 영암읍

은혜 갚은 비렁뱅이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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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어릴 때 이쪽 서남리 근방 남문 밖에 조동O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들은 얘기로는 동출이가 본래 머리가 좋았어라. 그런데 돌아버렸어. 정신이 확 돌아버렸지라.
 일제 때 영암읍내에는 거의 일본 사람들 전방이 많이 있었는데, 동출이가 그곳 일본 사람 가게에서 일 했어, 그 가게주인 일본 각시가 무지하게 예뻤는가 봐. 젊은 동출이가 일본 각시에게 한 눈을 팔았는지, 일본인 남편에게 뒤지게 맞아서 머리가 이상해졌어.
 나중에 남문 밖 진고개 사태 언덕에 굴을 파고 살았는데, 성벽 위에서 큰 도팍을 굴려 내렸다가 다시 올리고 또 도팍을 굴려 내렸다가 다시 올리고를 반복했어. 머리가 돌아버린 것이지라.
 해방 후에는 대신리에서 삼시로 영암을 왔다갔다 구걸을 하며 살았는데, 그 때 동출이 뒤에 어린 딸이 오고, 그 뒤에 젊은 여인이 따라 다녔어. 셋이 영암 시장통을 돌아다니며 거렁뱅이 노릇으로 살아갔어라. 동출이가 지나갈 때면 어린이들이 나와서“동출이 방구는 육대죽”하며 놀리기도 했지만, 어린 딸이 지나갈 때면 아짐씨들이 나와서 과자랑 인형이랑, 먹을 것을 챙겨주었는디, 육이오 전쟁이 터지고 여수순천 사태의 여파가 여까지 미쳐서 동출이가 빨치산 연락군이라고 몰아서 총살해 버렸어.
(조사자 : 동출이가 그런 능력이 있었어요?)
 아니, 그냥 핑계로 죽여 버린 것이제. 거렁뱅이로 돌아다닌다고 보기 싫으니까.
 동출이가 죽고는 마누라하고 공딸은 어디론가 가버렸지.
(조사자 : 공딸이 뭐죠?)
 진짠지 몰라도 어른들이 얘기하기론 동출이는 고자라고 했어. 자다가 뜨거운 불에 고추가 타버려서 생식능력이 없다고 했는디 사실은 모르겠고, 아무튼 그래서 동출이 딸은 그 마누라가 어디서 데려온 의붓딸이라고들 얘기 했제. 그냥 그렇게들 믿었어. 동출이가 그 여자하고 정식으로 혼인했을리 만무하고, 그래서 그냥 뭐 그렇게들 얘기했나봐. 맨날 같이 다닝께, 가족 같이 그냥, 그 셋이 가족처럼 함께 다니며 구걸해서 먹고 산거야. 영암장 근방에서 이들이 맨날 보였는디 어느 날부터 안 보잉께 더 놀리지도 못하고 그랬제.
 그런데 몇 년 후 어느 날 딱, 그 딸이 커서 영암에 나타났는데 흰 고무신을 가마니로 여러 개를 가지고 와서 동무리 일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줬어. 당시는 대부분 검정 고무신만 신었지, 흰 고무신은 비싸서. 그 때 흰 고무신은 대단히 비싼 것으로 지금으로 치면 유명 메이커 신발정도 값어치가 있었을 거야.
 뜬금없는 일에 사람들이 어리둥절 했제.“뭔 돈 많은 부인이 선물한다냐”하고 있는데, 자신이 동출이 딸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알아보았지, 거 참, 행색이 돈 많은 여인으로 나타나서 아무도 못 알아보았지. 워쩌코롬 때꼽자기 시꺼멓게 낀 어린 계집아이가 그토록 변했을 줄 알았겠어. 아마도 자신이 어렸을 적에 신세졌던 읍내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으려고 그랬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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