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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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이야기 미암면

기동마을 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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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외할머니한테 들었는데, 기동에 광산김씨가 터를 잡은 얘기여. 내 증조 외할아버지가 나주 공산에서 동학군을 조직해갖고 나와서 장흥 석회들에서 전면전을 벌이는데, 그때 그 석회들 전투는 말이 전투제 학살이어라, 학살.
 왜냐하면 그 당시 병영에만 해도 총을 쏘는 소총수가 열아홉 명이나 있었고, 일본군들이 최신 미군 미제 자동 기관총을 걸어놓고 갈겨부렀어라.
 그래갖고 들판에서 싸우는데 그 당시 동학군은 기껏해야 장총이나 칼 창 그런 것 밖에 없었잖아요. 들판에서 자동 기관총으로 갈겨분께, 그대로 걱서 다 죽어 부렀어라. 그야말로 학살 이었제.
 차라리 수인산성에서만 버터야 된디, 석대들로 내려와서 싸운 것이 잘못이었제. 그래서 다 당해부렀는디, 우리 증조 외할아버지 혼자서만 살아갖고 내빼분 것이지라. 그래갖고 바닷가를 따라서 계속 도망쳐 온디, 어느 마을도 받아주지를 안했어라. 왜냐하면 동학군을 하나 숨겨주면 마을을 초토화 시켜부니까.
 그러다가 해변을 따라 여그 미암 기동마을까지 도망을 왔는디, 기동마을에서 받아 준거여. 기동마을이 의리가 있는 마을이제, 마을 전체가 전멸을 당할 각오를 하고 받아준 것인께.
 그래가지고 기동마을에서 광산 김씨가 살기 시작하게 된 것이고 그 양반이 요쪽 시조라고 봐야지라.
 그라다가 일본 헌병들이 냄새를 맡고 거그까지 잡으러 온께, 마을 사람들이 미리서 파놓은 황토밭 굴속에 숨어 있다가 나오고, 오면 또 숨어 있다가 나오고 그래갖고 그 양반도 살고 다행히 마을도 피해가 없었다고 했어라.
 우리 외할아버지가 장남이고 종손인디, 걱서 배 세 척을 가지고 인천으로 왔다 갔다 함시로 무역업을 해갖고 돈도 잘 벌고 멋지게 삼시로 마을 사람들한테 잘해주었어라. 그라고 아들은 없고 딸만 둘이었다고 했어라.
 그란디 그때 호열자 전염병이 와부렀어라. 그래갖고 일본관에서 나와서 배 두 척에다가 실어 놓은 젓갈을 폐기처분하고 소독도 해분께, 화병이 나부렀제. 그라고 우리 외할아버지도 그 병에 걸렸던 것 같아라.
 그때 외할머니 뱃속에 우리 어머니가 들어있었어라. 그러니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아들이 없은께, 한숨을 쉼서여그서 아들이 태어나야 내가 안 죽은디, 딸이 태어나부면 나는 영원히 죽는다.”했는디, 우리 어머니를 나부렀제.
 그래갖고 우리 어머니 이름이‘있을 유’자,‘배 복’자 써서 뱃속에 있었다 해서 유복이여. 그래서 대가 끊어지고 지금 살고 있는 OO 씨가 기동마을 광산 김씨 종가집이 되었제.
 그 당시 공산에서 함께 나간 사람들은 한 사람도 안 돌아왔다고 했어라. 다 죽어불고 우리 증조 외할아버지만 기동마을 덕택으로 살아 나셨제.
 그랑께 석대들 전투가 아조 엄청나게 동학군 희생이 큰 전투고, 그것이 이쪽에서는 마지막 전투였제. 지금도 장흥가면 동학군 후손들하고 관군 후손들이 화해를 안 하고 있다고 하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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