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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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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당(安用堂) • 창건시기 : 1670년경 • 위치 : 군서면 구림촌(鳩林村) 태어났는데, 어려서 부친을 모시고 낭주(朗州) 구림촌(鳩林村)으로 옮겨 와 살았다. 아름다움은 남쪽 지방의 으뜸으로, 조씨 어른의 거처는 마을의 한 귀퉁이를 차지해서 그윽하고 깊으며 정갈한 풍취가 있다. 비용을 충당할 수 있으며, 고기 잡는 포구와는 거리가 백 걸음도 안 될 만큼 가깝기에 날마다 그물을 쳐서 살진 물고기들을 잡아 조석(朝夕)의 반찬을 이어 갈 수 있다. 좌우에는 귤과 유자, 석류, 매화, 살구나무 등을 심었으니, 이어진 가지들이 교차하여 그늘을 이루고 꽃과 열매들이 환히 빛나 기이한 구경거리에 이바지하고 열매를 실컷 저장할 수 있다. 맞추는 데 적합하다. 당의 앞뒤로는 돌을 쌓고 화초와 대를 줄짓게 하였으며, 연못을 파고 부들과 연꽃을 심었다. 지팡이를 짚고 그사이를 거닐자면, 사계절 물태(物態)가 변하는 걸 보며 눈과 귀의 즐거움에 이바지할 수 있다. 게다가 손님이 오면 친소(親疎) 를 가리지 않고 반드시 고기를 썰어 술안주 삼아 기쁘게 마주하여, 술독이 비워지지 않으면 그만두질 않았다. 그러다가 흥이 나면 문득 누렁이를 이끌고 매를 날리면서, 노복으로 하여금 가죽 부대 하나를 지니게 하고는 평원과 큰 산기슭 사이를 마음대로 노닐며 꿩과 토끼 쫓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이따금 대나무로 만든 가마나 작은 배를 타고 마음 내키는 대로 가는 곳이 산속의 절 아니면 호숫가의 정자로, 또한 괴로움을 흩어 버리고 답답함을 펼칠 수 있었으니 죽을 때까지 싫증 내지 않았다. 비록 반곡(盤谷)에 부족함이 없었다 한들, 어찌 이곳보다 나았으랴. 어찌 다른 사람들과 다르랴마는, 내가 보니 조씨 어른은 어려서 과거 응시를 위한 학업을 익히지 않았다. 느긋함을 즐겨 자유롭게 살았기에 비록 준조(俊造) 의 대열에 낄 수는 없었지만, 그의 기의(氣義 기개와 의리)와 간국(幹局 재간과 국량)은 오늘날의 수많은 벼슬아치와 비교해 보더라도 나으면 나았지 모자람이 없었다. 이 아닌 사람이 없어서, 인재를 선발하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앞뒤로 발길을 이었다. 조 씨 어른이 한번 입만 열면 도리어 도와줄 사람이 부족하지 않았지만, 검은 인끈을 매거나 민사(民社)의 어른 노릇을 그만둔 지도 벌써 오래되었다. 그 지키는 바에 끼어들 것이 없었다. 안타까워하지만, 조 씨 어른은 바야흐로 유유자적 노닐면서 스스로 만족해한다. 구함 없는 사람이 어찌 아니겠는가. 앞서 언급한 대로 벼슬길에 분주하며 요행을 바라다가 더러운 행동을 하거나 형벌에 처해지는 사이에서 늙어 죽는 자들과 비교해 보면 과연 어떠한가. 우재(尤齋) 송시열(宋時烈)이 안락옹(安樂翁)의 “이미 한가해졌으니 어찌 다시 이름을 고치랴.〔旣閒安用更名爲(기한안용경명위)〕”라는 시구를 취해다가 당호를 ‘안용당’ 이라고 지었으니, 조 씨 어른을 아는 것이 깊다고 말할 만하다. 그리고 또한 이로써 세상의 명예만 좇다가 몸을 망치는 자들은 경계할 만하다. 헛된 명성에 잘못 걸려들어 한가함을 구하려다가 얻지 못한 자이다. 그런데 지금 조 씨 어른의 당에 올라 내심으로 그분의 한가로움을 부러워하다가, 속인들보다 훨씬 그 뜻이 크고 뛰어난 걸 아름답게 여기면서, 이에 쓰노라. 仍居焉 村在月出山下 湖海林園之勝 甲于南友 而曹丈所居 據村之一偏 得幽深窈 窕之趣 旁多陂田汚邪收其利 足以充伏臘之費 去漁浦不百步而近 日必擧網得雋 足 以繼朝夕之羞 左右植橘柚安榴梅杏之屬 連柯交蔭 華實照爛 足以供奇翫而侈飣餖 就宅之左 闢之以爲堂 涼軒燠室 足以適四時節宣之宜 堂之前後 壘石而列卉竹 鑿 沼而種蒲蓮 杖屨消搖其中 足以觀時物之變 資耳目之娛 客至無親疏 必刲腴佐酒 歡然相對 罍不恥不止 興到輒牽黃擎蒼 使奚奴携一鴟夷 縱游平原大麓之間 逐雉兔 以爲樂 有時筍輿舴艋 隨意所之 非山寺則湖亭也 亦足以散煩鬱暢幽悁而終身不厭 矣 雖盤谷之無不足 何以過此 吾知世之閒適者 莫曹丈若也 然慕通顯而惡沈晦 曹 丈豈異於人哉 余觀曹丈少不習公車業 樂弛置自放 雖不得與於俊造之列 而若其氣 義幹局 視今之爲百執事者 有過而無不及焉 況其戚故姻婭 無非世所稱名門望族 秉 勻持衡者 前後踵相躡也 卽曹丈一開口 顧不乏與爲吹噓者 纍墨綬長民社 其已久矣 乃曹丈獨謂旣得其閒 無所用乎名 泊然不以干其守 年今迫七袠矣 皓首布衣 人皆嗟 惜 而曹丈方且優游自得 未見有戚戚色 豈所謂安其命 無求於外者耶 其視向之奔 走徼倖 老死於汚穢刑辟之間者 果何如也 尤齋宋先生取安樂翁旣閒安用更名爲之 語 名其堂曰安用 可謂知曹丈之深 而亦可以警世之徇名喪身者矣 曹丈屬余演其語 以爲記 若余者坐誤虛名 求閒而不得者也 今登曹丈之堂 竊羨其閒而韙其志之遠邁 於俗人也 於是乎書 호해림원지승 갑우남우 이조장소거 거촌지일편 득유심요조지취 방다피전오사수기이 족이충복랍지비 거어포불백보이근 일필거망득준 족이계조석지수 좌우식귤유안류매행지속 란가교음 화실조난 족이공기완이치정두 취택지좌 벽지이위당 량헌욱실 족이적사시절선지의 당지전후 누석이열훼죽 착소이종포련 장구소요기중 족이관시물지변 자이목지오 객지무친소 필규유좌주 환연상대 뢰불치부지 흥도첩견황경창 사해노휴일치이 종유평원대록지간 축치토이위악 유시순여책맹 수의소지 비산사칙호정야 역족이산번울창유연이종신불염의 수반곡지무부족 하이과차 오지세지한적자 막조장약야 연모통현이악침회 조장기이어인재 여관조장소불습공차업 악이치자방 수부득여어준조지열 이약기기의간국 시금지위백집사자 유과이무불급언 황기척고인아 무비세소칭명문망족 병균지형자 전후종상섭야 즉조장일개구 고불핍여위취허자 류묵수장민사 기이구의 내조장독위기득기한 무소용호명 박연불이간기수 여기서 조중선의 부친은 태호(兌湖) 조행립(曺行立, 1580~1663)이며, 어머니는 청도김씨로 별좌(別坐)를 지낸 김윤선(金胤先)의 딸이다. 조중선은 어머니의 고향인 서울에서 낳은 듯하며, 그의 나이 9살 때 가족과 함께 할머니의 고향인 구림에서 살게 되었다. 그의 할머니는 광주 목사를 지낸 선산 임씨 월당(月堂) 임구령(林九齡, 1501~1562)의 딸로서 구림의 최고가는 갑부이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아버지 조행립은 벼슬에 나아갔으며, 가족은 구림에 두고 수시로 왔다 갔다 한 듯하다. 1631년부터 1643년 사이에 구림에서 머물렀고, 1644년 후로는 벼슬을 사양하고 구림과 소화산을 오가며 만년을 보냈다. 그가 미암면 소화산 아래에 터를 옮긴 것은 대략 1645년경으로 추정된다. 이때 안용당의 주인 조중선(曺仲宣)의 나이 35세를 넘겼을 터이다. 그해 조행립의 둘째 아들 조경위(曺敬瑋, 1608~1645)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일이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 조행립은 그 충격으로 구림 집을 셋째 아들에게 비워주고, 다섯째 아들 조경보(曺敬輔)와 함께 선황리 소화산 아래에 터를 잡아 들어간 듯하다. 김수항은 기문을 통해 자신의 처지와 빗대어 조중선의 삶을 진정으로 부러워하는 심정을 피력했다. 자신에 대해‘명성을 날리는 사람들은 늘 명리(名利)의 굴레에 매인 걸고통스러워하고’있는 모습을 보고, 반대로‘한적한 곳에 처한 사람들은 매번 묻혀 사는 것을 병적 고통으로 여긴다’지만 조중선은 이마저 초탈한 삶을 살고 있다 하였다. 江潭芳杜若(강담방두약) 유배지의 꽃다운 두약이라 遙知鼓枻人(요지고설인) 멀리서도 알겠으니 노 젓는 어부 尙記行吟客(상기행음객) 귀양객 아직도 기억하리란 걸 別有閒人樂事俱(별유한인악사구) 남달리 한가한 사람에게 즐거운 일 갖춰졌도다 檻外晴雲來月嶽(함외청운래월악) 난간 밖의 갠 구름은 월출산에서 오고 門前春水散西湖(문전춘수산서호) 문 앞의 봄물이 서호로 흩어지는구나 舟回竹島魚登網(주회죽도어등망) 죽도로 배 돌리면 물고기가 그물에 오르고 棋罷梅窓酒滿壺(기파매창주만호) 매화 핀 창에 장기 파하면 술이 병에 가득하나니 天放似君誰不羨(천방사군수불선) 하늘이 내신 그대 같은 분 누군들 부럽잖으랴 白頭遷客愧迷塗(백두천객괴미도) 머리 하얀 귀양객은 부끄럽게 길을 잃었다오 《文谷集(문곡집)》제5권. 이 시에서는 빼어난 경치 속에 한가롭게 지내는 주인장을 부러워하는 유배객의 심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마흔일곱에서 쉰 살까지 영암에 유배되어 지냈다. 갓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백발(白頭)을 하였으니, 천객(遷客 귀양살이하는 사람)으로서 고생이 많았던 모양이다. 무더위에 조양 중이신 체후가 갖가지로 도움을 받으시는지요? 구구하게 우러러 위로를 드립니다. 창집 등은 문중의 운수가 불행하여 또 종매(從妹)의 상사(喪事 ) 를 듣고 놀랍고 마음이 아픈 슬픔을 어떻게 비유하여 말씀드리겠습니까? 자친(慈 親)이 떠나실 기일은 아직 앞당기거나 미룰 뜻이 없으시며, 비가 내릴 기미가 있어 아직껏 활짝 개이지 않고 장마를 이룰 징조가 있으니 이것이 민망스럽고 염려가 됩니다. 인부(人夫)와 말(馬)은 내일쯤 들여보내시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다만 비가 내릴 조짐이 이와 같으니 형세를 보아가면서 들여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감격스러움은 다함이 없습니다. 지금 한창 길을 떠나려고 행장 꾸리는 중이므로 다시 편지 드릴 겨를이 없으니 우러러 섭섭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다 말씀드리지 못하오니 살펴 주소서. 삼가 경의를 표하여 답장을 올립니다. 절합니다. 下札就審雨後蒸炎(하찰취심우후증염) 調濃萬相瞻慰區區集等門運不幸(조농만상첨위구구집등문운불행) 又聞從妹之喪驚痛慘怛尙何云(우문종매지상경통참달상하운) 喩慈親行期姑無進退之意而雨(유자친행기고무진퇴지의이우) 意尙未開露似有成霖之徵是用(의상미개로사유성림지징시용) 悶慮人馬則趁明(민려인마칙진명) 入送爲宜而但雨勢如許觀勢起送如何(입송위의이단우세여허관세기송여하) 下惠各種行饌與甘酒依受伏感(하혜각종행찬여감주의수복감) 不己今方治任無暇更 不勝瞻悵(불기금방치임무가갱불승첨창) 不宣伏惟(불선복유) 下察謹再拜謝狀上(하찰근재배사장상) 戊午五月二十日 服人 金昌集 等 拜(무오오월이십일 복인 김창집 등 배) <김창집 간찰> 『安用堂 資料集(안용당 자료집)』, 38쪽 김수항은 1678년 9월에 영암을 떠나면서 구림 사람들과 특히 조경찬 어르신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留別曺丈敬璨 兼示鳩林諸人(유별조장경찬 겸시구림제인)-조경찬 어르신과 이별하며, 아울러 구림의 여러 사람에게 시를 남기다>라는 칠언절구를 남겼다. 月出千峯相對親(월출천봉상대친) 월출산 천 봉우리 마주 보다 친해졌는데 今日北歸回首望(금일북귀회수망) 오늘은 북으로 돌아가며 머리 돌려 바라보니 峴山眞似故鄕人(현산진사고향인) 현산은 참으로 고향 사람처럼 포근하게 느껴지네 平生義薄雲(평생의박운) 평생 의리가 하늘에 닿으셨더니 居然湖海氣(거연호해기) 우뚝하던 호수와 바다 같은 기상 埋却廣陵墳(매각광릉분) 도리어 광릉 무덤에 묻히셨구려 이 시를 통해 안용당 주인을 사모하는 김수항의 심정이 전해온다. (湖上)에 도착하였으니 그전처럼 자주자주 시로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드릴 말씀은> 단지 이뿐이니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荷(하) 意良深無以爲囑夜來(의량심무이위촉야래) 起居如何姪兒葬後復到(기거여하질아장후복도) 湖上則源源相奉復(호상칙원원상봉복) 如前日之爲耳只此(여전일지위이지차) 下照(하조) 惠送海依受多謝(혜송해의수다사) 遠情(원정) 癸卯二月十六(계묘이월십육) 服人時烈(복인 시열) 이 서간문을 통해 송시열과 안용당이 오래 전부터 시(詩)를 주고 받는 사이라는 것을 알 수있다. 송시열은 조경찬(曺敬璨, 1610~1678)에 비해 세 살 연상이다. 삼가 답장을 올립니다. 되니 극성(棘城) 가운데 깊숙히 <묻혀있는 처지에> 어찌 천금(輟金)의 값어치가 될 뿐이겠습니까? 살펴보건대, 서늘한 가을철에 기거 동작이 편안하시다니 또한 기쁩니다.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은 모두 본분(本分)이기에 편안하게 여기면서 운명을 따르기로 한 지 오래입니다. 오직 앞으로 닥쳐올 일은 알 수가 없으니 또한 저절로 미리 정해져 있으니 단지 조용히 기다릴 따름입니다. 서로 바라보기가 매우 머니 오직 더욱 아끼셔서 심복(心腹)하는 정성을 위로하시기 바랍니다. 令姪遠來仍拜(영질원래잉배) 惠書棘城幽深之中河趐(혜서극성유심지중하혈) 直千金耶固審秋涼(직천김야고심추량) 起處安勝又以爲喜此漢所道皆(기처안승우이위희차한소도개) 是本分安安若命久矣惟是(시본분안안약명구의유시) 前頭事有不可知者而亦自前(전두사유불가지자이역자전) 定只有靜俟而已相望甚遠惟冀(정지유정사이이상망심원유기) 加愛以慰響之誠佳味珍謝只(가애이위향지성가미진사지) 此 下照(차 하조) 乙卯八月十七日(을묘팔월십칠일) 纍人時烈( 류인 시열) 삼가 보내주신 편지를 받아 공손히 근간의 동정을 살펴보니 마음을 기울여 위로하심이 이미 깊습니다. 인해서 또 이렇게 곤경에 처한 것을 염려하여 굶주림을 모면할 자료를 도와주시니 어진 은혜를 우러러 인식하며 무어라고 사례할 수 없어 몹시 두렵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지난달부터 위장의 증세가 대단히 심각하여 밥을 먹을 수가 없으니 평생의 죄과를 스스로 돌아본 지 이미 오래입니다. 하지만 이대로 갑자기 죽기라도 하면 이는 성상(聖上)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悳)을 저버리는 것이니 이 때문에 마음을 굳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은혜롭게 보내온 세 가지 맛 좋은 음식물은 모두 이곳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며, 아울러 병든 사람의 입맛에 적합한 것이기에 <보내신> 지극한 뜻을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나머지는 누워서 편지를 대신 쓰게 하는 입장이어서 다 말하지 못하니 살펴 주소서. 曹上舍 宅(조상사 택) 伏承(복승) 下書恭審(하서공심) 近履旣深傾慰仍又(근이기심경위잉우) 念此涸轍副以庚癸之資仰認(념차학철부이경계지자앙인) 仁思無以爲謝而亦深惶仄也 此 自去秋痔(인사무이위사이역심황측야 차 자거추치) 漏甚苦有時乞死又自前月胃症頓劇(누심고유시걸사우자전월위증돈극) 不能喫飯自顧罪戾全生已久而從此溘烈(불능끽반자고죄려전생이구이종차합렬) 則卽負 聖上好生之德以是不能不耿耿也(칙즉부 성상호생지덕이시불능불경경야) 惠來三種佳味皆是此地所無而並宜病(혜래삼종가미개시차지소무이병의병) 口並領 至意也餘伏枕倩草不宣(구병령 지의야여복침천초불선) 下照 戊午四月九日(하조 무오사월구일) 纍人 時烈(류인 시열)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김수항이 조중선 어른을 그토록 가까이 했던 이유도 이해가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