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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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누정

수산정

설명요약
수 산 정 - 광산인 김자진의 은거지소

본문

 

수산정(首山亭)


• 창건자 : 김자진(金子進)

• 창건시기 : 15세기

• 위치 : 신북면 갈곡리 우정산 아래(나주시 공산면 상방리 삼장산)


 수산정은 광산인 수산정(首山亭) 김자진(金子進)이 나주(현재 신북면 갈곡리)로 낙향하여 세운 정자이다. 그는 고려말 금위사정(禁衛司正)을 지냈으나, 고려가 망하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 야은(冶隱) 길재(吉 再) 등 두문동 72현(杜門洞 七十二賢)과 결의한 후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김자진은 1392년 신북면 갈곡리 우정산 아래에 은거지소를 마련하고 칩거하였다. 그는 스스로 거주한 지역을 ‘나의 마지막 거처’라는 의미의 종오리(終吾里)라 부르고, 뒷산을 수양산(首陽山)이라 하고, 그가 세운 정자를 수산정(首山亭)이라 칭하였다. 그는 은거터로 잡은 산을 백이·숙제(伯夷叔齊)가 채미수양(菜薇首陽)했던 의미로 수양산(首陽山)이라고 이름하며 절의(節義)를 지킨다는 의미를 담았다.


 1897년에 간행된 노필연(盧佖淵)의 ≪克齋集(극재집)≫ 6권‘ 두문동칠십이현록(杜門洞七 十二賢錄)’에 “[金子進 光山人 官司評 麗亡 退居羅州 以麗字名其田山亭井](김자진 광산인 관사평 려망 퇴거나주 이려자명기전산정정)-김자진(金子進)은 광산인으로 사평(司評)을 역임하였으며, 고려가 망하자 나주로 퇴거하여, 고려의 려(麗)자를 써서 밭[田], 산(山), 정자[亭], 우물[井] 이름을 지었다.”고 적고 있다.


 김자진(金子進)은 이곳에 은둔하며 살고 있을 때 이성계가 우의정 등 대관(大官)으로 세번 제수 했으나 불응하고 자숙하며 정충고절(精忠高節)으로 평생을 마쳤던 일화가 전한다. 수산정이 자리했던 갈곡(葛谷)은 나주군에 속하였던 비음면(非音面)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종오리와 북이종면의 신평리 치리리 우정리를 병합하여 갈곡리라 해서 영암군 신북면에 편입되었다.


 수산정은 세월이 지나 1795년 중수하였으며, 이후 어느 시기에 사라지고, 현재는 <司 正公首山亭遺墟碑銘(사정공 수산정 유허비)>와 <首山亭遺墟碑銘(수산정유허비명)>’이 남아있다. 앞의 유허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13


 공은 고려 말 혁명의 때가 되자 신하로 변치 않는 지조를 품었으므로 여러 번

우리 조정에서 징소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그 정자의 이름을 수산이라고

하고, 그 담장의 이름을 여성(麗城)이라고 했으며, 그 우물의 이름을 여정(麗井)

이라고 하고 그 토지의 이름을 여전(麗田)이라고 하여 다시 하늘의 해를 보지


않고 죽을 때까지 후회가 없고자 하였다. 공은 바르고 충량하며 의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서 대단한 명성이 저 먼 훗날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公當麗季革命之秋懷人臣不貳之操屢被我聖朝徵召終不膺名其亭曰首山名其墻曰

麗城名其井曰麗井名其田曰麗田不復見天日而沒齒無悔公可謂貞諒循義之士而其

將樹風聲於百世之下哉

(공당려계혁명지추회인신불이지조루피아성조징소종불응명기정왈수산명기장왈려성명기

정왈려정명기전왈려전불복견천일이몰치무회공가위정량순의지사이기장수풍성어백세지

하재)


이 글은 1809년 수록대부 광식부위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김기성(金箕性)이 지은 것이다.
그는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의 장녀(長女)인 청연군주(淸衍郡主)와 혼인하여 광은부위(光恩副尉)가 되었으며, 서사관(書寫官)을 지냈다.
<首山亭遺墟碑銘(수산정유허비명)>은 1866년에 김태보 등 후손들이 세웠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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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로 임금을 섬길 때는 누구나 의(義)를 다하고 충(忠)을 다 하기를 기약하지만,

정말이지 영욕과 화복에 따라서 그 마음을 바꾸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끝내 인(

仁)에 대하여 성취한 자가 될 것이니, 여러 문적을 보면 무수하다. 아마 순수하고

강직한 기를 받은 자가 적어서 식견이 바르고 인욕을 막아 천리를 보존하여

오랫동안 기르는 사람은 창졸간에 사라지고 위급할 때에 스스로 지키는 것을

잃지 않는 자가 드물어서 영욕과 호복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 뜻을 버리게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공자가 인을 이루었다고 하고 맹자가 의를 취한다고 한 것이 어찌 대단하지

않겠는가? 호남 나주 땅의 수산정은 고려 조의 사정 김 공이 은둔하여 길게 살던

곳이다. 공은 고려 말 혁명의 때가 되자, 신하로 변치 않는 지조를 품었으므로

여러 번 우리 조정에서 징소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그 정자의 이름을

수산(首山)이라고 하고, 그 담장의 이름을 여성(麗城)이라고 했으며, 그 우물의

이름을 여정(麗井)이라고 하고, 그 토지의 이름을 여전(麗田)이라고 하여,

다시 하늘의 해를 보지 않고 죽을 때까지 후회가 없고자 하였다. 공은 바르고

충량하며 의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서 대단한 명성이 저 먼 훗날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공은 광산을 본관으로 하니 휘가 자진(子進)으로 우리 선인인

평장사(平章事)의 후예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한 굽이 푸른 산은 인을 구하는 땅이고, 높은 바람을 바라는 것은 짧은 빗돌의

남은 글이로다.
수록대부 광식부위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김기성 지음


 현재 신북면 갈곡리에는 수산정이 남아있지 않지만 나주시 공산면 상방리 삼장산에

수산정이라는 이름의 팔각정이 있다. 이것은 김자진의 묘소 옆에 후손들이 1973년에

세운 것이다. 정자 형태는 과거 전통을 이어받은 것은 아니지만 내부에 걸려 있는 현판은

수산정의 정신을 전하고 있다.


 조선 후기 순조, 헌종 때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의금부판사(義禁府判事), 규장각제학

(奎章閣提學)·경연지사(經筵知事) 등을 역임하였던 이탄재(履坦齋) 박기수(朴綺壽,

1774~1845)도 원운에 차운한 시로 그를 추모하며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忠義堂堂萃一門(충의당당췌일문) 당당하고 높은 충의 한 집안에 뛰어나니

爲言世德有賢孫(위언세덕유현손) 대를 이은 세덕(世德)으로 어진 후손 두었도다

尙餘孤竹靑風在(상여고죽청풍재) 아직까지 고죽(孤竹) 같은 맑은 바람 이어지니

未必萇弘碧血寃(미필장홍벽혈원) 아직도 장홍 같은 푸른 피가 원이 되었네

殉國由來臣子節(순국유래신자절) 신하되는 의리로서 나라 위해 헌신하고

全家自是聖君恩(전가자시성군은) 어진 임금 은덕으로 그의 집을 지켰도다

芳條會有敷榮日(방조회유부영일) 아름다운 꽃가지에 붉은 꽃이 피어나니

秋老當年又晦根(추노당년우회근) 금년 가을에도 역시 근본을 지키는구나


 시에서 고죽(孤竹)은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가리킨다. 두사람은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을 치러 가는 무왕(武王)을 말리다가 듣지 않자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로 무장현감과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등을 지낸 겸재(謙齋) 기학경(奇學敬, 1741~ 1809)은 <謹次首山亭韻(근차수산정운)>으로 수산정을 기리고 있다.


光山精氣得歸全(광산정기득귀전) 광산(정기(正氣) 이어받아 높은 절의 이룩하니

義士高名星斗縣(의사고명성두현) 의사(義士)라는 그 이름이 별빛처럼 빛났도다

首子孤亭慕古聖(수자고정모고성) 옛날 성인 사모하여 수(首)자 이름 붙이었고

箕封小國殷淸賢(기봉소국은청현) 기자(箕子) 조선 이 나라에 어진 선비 숨었구나

西山薇蕨殷遺草(서산미궐은유초) 서산 위에 올라 고사리 캐니 은나라 풀이로세

南土稻禾麗賜田(남토도화려사전) 남쪽 땅에 터를 잡아 사전(賜田) 땅을 갈았다네

片碣千年知不朽(편갈천년지불후) 조그마한 이 비갈(碑碣)이 썩지 않고 남았으니

前朝忠烈我朝傳(전조충렬아조전) 고려의 그 충렬(忠烈)은 조선에까지 빛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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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누정이야기』113쪽. 나주시 공산면 상방리 복사초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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