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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월당

주  소
요 월 당 - 선산인 임구령의 교유처

본문

 

요월당(邀月堂)


• 창건자 : 임구령(林九齡)

• 창건시기 : 1536년/1614년경 중수/1671년경 중수/1692년경 중수/현재 멸실

• 위치 : 군서면 서구림리 서호정마을 국사암 옆


 요월당(邀月堂)은 구림리 국사암 옆에 있으며, 1536년에 월당(月堂) 임구령(林九齡, 1501~1562)이 36세에 건립한 정자이다. 규모가 크고 아름다우며 주위의 경치가 또한 수려하였다.
1793년에 발행된 『靈巖邑誌(영암읍지)』에는 다음의 내용이 실려 있다.


邀月堂 在邑西邊二十里 林億齡詩(요월당 재읍서변이십리 임억령시)

읍의 서쪽 20리 거리의 군서면 서구림리에 있다. 요월당에는 임억령의 시문이 있다.


 이어서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의 <題詠邀月堂詩(제영요월당시)> 한수가 수록되어 있다.


峰奇何必刻(봉기하필각) 산봉우리 기묘하니 어찌 그리 깎였을까

月入不煩邀(월입불번요) 찾아오는 밝은 달은 마중하기 편하구나

桂影橫階竹(계영횡계죽) 계수나무 그림자는 계단 아래 비껴있고

金波動酒瓢(금파동주표) 물결치는 황금빛은 술잔 위에 요동친다

孤枕客無夢(고침객무몽) 외로운 배게 위에 나그네 잠 못 이루고

小床虫獨謠(소상충독요 ) 조그마한 평상 밑에 벌레 소리 처량하네

秋陰苦如殺(추음고여살) 가을 그늘 무정하게 달빛을 세우는지

微雨曉蕭蕭(미우효소소) 새벽녘에 이슬비가 쓸쓸하게 내렸다네


『善山林氏大同譜(선산임씨대동보)』 문헌록에 요월당에 관한 소개가 있다. 174


 요월당은 구림리의 국사암 뒤에 있으며, 병신(1536, 중종 31)년에 월당공(휘

구령)께서 36세에 건립한 정자이니, 규모가 크고 아름다우며 주위의 경치가 또한

수려하였다. 형 석천(石川) 임억령 선생의 시를 난간에 현판하고,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 옥봉(

玉峯) 백광훈(白光勳), 오음(五陰) 윤두수(尹斗壽),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백호(白湖) 임제(林悌) 등 여러 명사가 출입하여 시를 수창 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구가 정자의 동남쪽에 불을 지르다가 그 크고 아름다움에 놀라 곧 끄고 임억령과

황정응 두 선생의 시에 매료되어 그 현판을 떼어갔다. 그 20년 후에 외손 남곽

박동열이 나주목사 때 중수하였고, 다시 57년 후에 5대손 임익서가 보수하고, 또

21년 후에 6대손 석징이 다시 수선하고, 그 후 50여년 동안 서까래가 내려 않는 등

훼손이 심하여 인근 내외손들이 협력하여 기둥을 다시 갈고 규모를 줄여 단단히

보수하였다.


 여기서는 요월당이 국사암 뒤에 있다고 하였으나, 해평인 석촌(石邨) 윤용구(尹用求)가

기술한 글에는 ‘요월당 뒤에 국사암[邀月堂後國師庵(요월당후국사암)]’이라 하였다. 앞과

뒤는 관점의 차이일 뿐 요월당이 국사암을 등지고 자리했다는 것은 일치한다.


『선산임씨대동보』에는 앞서 본 임억령의 오언율시에 이어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 , 1532~1607)의 차운시, <次邀月堂韻(차요월당운)-요월당 시를 차운함>이 실려 있다. 175


明月如相約(명월여상약) 밝은 달이 언약한 듯

團團赴我邀(단단부아요) 두리둥실 찾아오네

思時一望魄(사시일망백) 생각나면 쳐다보고

喜極幾傾瓢(희극기경표) 흐뭇하면 술잔 드네

碧落無千里(벽락무천리) 푸른 하늘 끝 없는데

佳人誰獨謠(가인수독요) 뉘가 혼자 노래하나

白頭頻佇立(백두빈저립) 우두커니 서는 백발

此意未凋蕭(차의미조소) 마음만은 젊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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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梧陰遺稿(오음유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193A_V001_016A_IMG


 황정욱(黃廷彧)은 조선 중종-선조 때의 문신으로 자는 경문(景文)이고, 호는 지천(芝川) 이다. 벼슬이 예조 판서, 병조 판서에 이르렀다. 문장·시·서예 등에 능했고, 문집으로는 《 芝川集(지천집)》이 있다. 이 문집에는 요월당에 대해 ‘영암에 있는 직장 임호의 정자[直長 林湖亭子 在靈巖]’이라고 적혀 있다


 임구령의 장남 구암(龜巖) 임호(林浩, 1522~1592)가 중부(仲父) 석천(石川) 임억령(林億 齡, 1496~1568)의 운에 따라 요월당의 감회를 읊었다.


歸來湖海臥(귀래호해와) 서호 바닷가에서 돌아와 누웠더니

門外謝招邀(문외사초요) 문밖에서 부르는 소리도 그만 싫더라

事業尋黃卷(사업심황권) 일이라는 게 책 보는 것이요

生涯樂一瓢(생애악일표) 산다는 게 물 한 그릇에도 즐거움일세

帝力其何我(제력기하아) 임금의 은혜 내게는 멀어도

康衢自放謠(강구자방요) 태평성세 혼자서 노래하네

堂前迎皓月(당전영호월) 요월당 앞 둥근 달은 밝기만 하여

萃髮映蕭蕭(췌발영소소) 백발만 소소히 반짝이도다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 1533~1601)도 <次邀月堂韻(차요월당운)-요월당 운을 차운하여>라는 오언율시를 남겼다. 그는 요월당이 영암(靈岩)의 임가(林家)네 정자라 하였다. 176


秋風今夕起(추풍금석기) 가을 바람이 오늘 저녁에 부니

好月此堂邀(호월차당요) 밝은 달을 이 당에서 맞이하네

海上人如玉(해상인여옥) 바닷가의 사람은 옥과 같고

盆中手可瓢(분중수가표) 동이 속은 손으로 떠 마실 만하네

夜深猶不寐(야심유불매) 밤이 늦었어도 잠들지 못해

詩就自成謠(시취자성요) 시를 지으니 절로 노래가 되네

淸景知難駐(청경지난주) 맑은 경치 머물러두기 어려움을 아느니

任他零露蕭(임타령노소) 이슬이 산쑥에 떨어지든 말든


 마지막으로 병산(屛山) 이관명(李觀命, 1661~1733)이 <邀月堂次林石川韻( 요월당차임석천운)-요월당에서 임억령의 시를 차운함>을 지었다. 177


盈盈海上月(영영해상월) 두둥실 바다 위로 떠오른 달을

夜夜堂中邀(야야당중요) 밤마다 정자에서 맞이하였지

勝事成千古(승사성천고) 아름다운 일이 천고에 전해오니

閑情付一瓢(한정부일표) 한가한 정을 한 바가지 술에 부치노라

空瞻銀漢約(공첨은한약) 부질없이 바라보노라 은하수에서 다시 만나자던 약속

誰繼玉盤謠(수계옥반요) 누구인가 옥쟁반 노래 이어 갈 사람이여

怊悵蟾宮裏(초창섬궁리) 슬프도다 달 속에

姮娥鬢亦蕭(항아빈역소) 항아의 귀밑털도 쓸쓸해졌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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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屛山集(병산집)≫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458A_A177_010L_I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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