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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松亭) • 창건시기 : 1675년경 • 위치 : 영암군 서호면 화송리 송정마을 김씨 송정(松亭) 김중명(金重鳴, 1634~1718)이 거처하면서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1689), 곽성구(郭誠龜) 등과 도의강마(道義講磨)하던 정자로 서호면 화송리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현존하지 않는다. 30리쯤에 한 터전을 얻어 선무당(宣武堂)을 지었는데, 그가 터 잡은 마을은 소나무 아래 시냇가에 있다고 하여 송정(松亭)이라 하는바, 소나무가 추운 한파에도 ‘홀로 청청한다’는 의미와 정고절지의(亭高節之義)의 뜻을 취했다 한다. 그후 선무당의 손자인 참의공 김중명이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와 그가 거처하는 정자를 송정이라 하였는데, 송정의 8세손인 송은장 김홍현이 송정의 옛터에 집을 짓고 편액하여 송은정사(松隱精舍)라 하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이른바 ‘겨울 고개에는 외로운 소나무가 빼어나다.’는 동령수고송(冬嶺秀孤松)의 자태를 간직하였다 한다. <1672년 김정발(金精發) 준호구(準戶口)> 출처 : http://hnkostma.org/emuseum/service/data
• 창건자 : 김중명(金重鳴)
『湖南樓旌總覽(호남누정총람)』과 『영암군향토지(靈岩郡鄉土誌)』의 기록에 의하면, 원래 현종(顯宗), 숙종(肅宗) 연간의 인물인 밀양
다만 화송리 송정부락에 그의 후손이 세운 송정사(松亭祠)라는 사우가 있어 김중명과 함께 홍의재(弘毅齋) 김승조(金承祖), 우남(寓南) 김윤신(金潤身)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100
밀양김씨의 영암 입향조는 김윤신(金潤身)이다. 처음 정착한 곳은 용두리(서호면)인데 1625년에 현손(玄孫)인 김홍발(金弘發)이 노동에 이거했고, 그에 앞서 1606년에 김홍발의 숙부(叔父)인 김곽이 송정으로 분거하면서 가계 분화가 이루어졌다. 김곽(金钁1574~1646) 의 자(字)는 계실(季實), 호(號)는 선무당(宣務堂), 부인은 문의박씨(文義朴氏)이다. 1603년 무과 병과로 급제하여 어모장군 행가배량수군만호를 역임했다. 김곽의 둘째 아들이 김정발 (金精發, 1610~1681)이고, 그의 장남이 김중명이다.
김중명(金重鳴, 1634~1718)의 자(字)는 원지(遠之), 호(號)는 송정(松亭)으로 우후(虞侯) 를 지냈다. 1662년 6월에 병조에서 왕명을 받들어 밀양김씨 내금위 김중명을 병절교위 용양위좌부장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1664년 12월는 선략장군 행요양위부사과무신 겸선전관으로 임명되었고, 1687년 6월에는 어모장군 행훈련원 판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1684년에 김정발의 7남매가 부모 사후에 부친이 생전에 일부 물려주었던 것에 이어서 나머지 전답과 노비를 나눠 가지면서 작성한 7남매 분재기(分財記)가 남아있다.
송정과 관련하여 『湖南樓旌總覽(호남누정총람)』의 기록에 전하는 내력은 다음과 같다. 101
선조 39년 병오(1606)년에 양수군만호(梁水軍萬戶) 김곽(金钁)이 영암 서쪽으로
일설에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김중명이 세운 송정을 왕께 헌납했다.’ 고 하지만, 102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어렵다.
이곳에는 김중명(金重鳴)을 비롯하여 밀양김씨 시조 김승조(金承祖)와 우남(寓南) 김윤신 (金潤身)을 모시는 송정사(松亭詞)가 있다. 이 사당은 밀양김씨 20세손 추호(秋湖) 김달호( 金達浩)가 1956년에 지은 것이다. 정내에는 후손 김달호, 나주 나정균 등이 쓴 기문과 덕은 송재직, 개성 이주혁 난성 김황 화산 권평원 등의 시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