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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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금석문 영암읍

통훈대부 류준 묘갈

주  소
영암읍 학송리 산 16
건립연대
숭정기원 후 55(1682년) *류준 : 1564~166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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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조선국 통훈대부 행 상의원판관 류공의 묘
숙인 완산이씨 부좌(祔左)

류준(柳浚)공은 자가 징원(澄源)이고 스스로 호를 사교(四矯)라고 하였다.
젊은 시절에 벼슬을 관두고 나주 모산에 정사(精舍)를 열어 강학하였다.
그가 학도들을 깨우칠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학문(學問)하는 방도는 다른 것이 아니다.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하며, 부부가 되어서는 서로 역할을 구별하고,
향촌에 사는 여러 연령의 사람들과의 관계나 벗과의 관계에서는
차례와 신의가 있어야 하는 것, 바로 이것이 학문하는 도이다.”
또 말했다. “엄격한 스승은 앞에 있으니 경전과 문적이 바로 그것이고,
강한 적은 안에 있으니 만물에 대한 욕심[物慾]이 바로 그것이다.”
그 말에 이치가 있고, 또 규범이 깊이 갖추어졌으므로
그 문하에 종유(從遊)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숭정(崇禎) 신축년은 공의 나이 78세로 그해 9월 초엿새에 공이 졸하였다.
문도들이 상복을 입고 장사를 지내고,
그 뒤에 또 사우를 세워 공에게 제를 지냈다.
12년이 지난 뒤, 손자 상운(尙運)이 시종관이 되어 사명(使命)을 받들고
남방으로 왔다가 부친의 명령이라고 하여 행장(行狀)을 짓고,
나에게 비명을 청하였다.
행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의 효성스럽고 우애 있는 행동은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 아버지인 첨정(僉正) 휘(諱) 몽익(夢翼) 공이 병이 들었을 때 류준 공은
5세였는데, 울부짖으며 나아가 제 몸으로 대신하기를 바랐다.
이에 첨정 공이 종이에 글로 칭찬하는 말을 썼는데,
그 말에 “하늘이 낸 효자로다”라고 하였다. 첨정 공이 죽자
류준 공은 8세였는데 혼자 있을 때마다 아버지를 부르며 울었다.
공의 모친이 그 병을 걱정하여 억지로 엄정하게 대하였는데,
공은 울며 듣지 않았다. 나이 24세에 소과에 입격하였다.
행동이 엄숙하고 말을 적게 하였으며 실속 없이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성균관의 재생들이 모두 추앙하고 존중하였다.
천계(天啓) 3년 계해년(癸亥年, 1623) 인조(仁祖)께서 반정(反正)하였다.
이에 앞서 폐조(廢朝) 15년 동안 벼슬아치들과 유생들이
이익을 논하는데 골몰하여 삿된 논의에 부회(附會)들이 경향(京鄕)에 만연하였다.
반정이 일어나자 빠르게 자신의 명예를 지키며 더럽혀지지 않은 이들을
선발하였는데, 이때 공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金吾郎]로
제수되었고, 어가를 모신 공로로 주부(主簿)로 승진하였으나,
부모가 연로하여 받들 수 없다고 하고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와 봉양(奉養)하였다.
모친의 병이 심해지자 공은 직접 손가락에 피를 내어 약으로 올렸으나,
끝내 돌아가시자 슬픔에 지쳐 몸을 상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아침에는 슬퍼하며 묘 주변을 살폈고, 꿈속에서도 정성을 들였다.
그러다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면 문득 침상을 밀어두고 무덤가에서 곡하였으며,
남쪽에서 맛있는 물고기가 났어도 어머니께서 좋아하셨던 것을 생각하여
공은 끝내 차마 먹지 못할 지경이어서, 끝내 무덤가에 움막을 짓고 살다 죽었다.
스스로 돌보는 것은 매우 하찮게 하였어도, 어머니께 올리는 음식은 매우 깨끗하게
하였으며, 하인들은 반드시 깨끗한 사람을 썼다.
기일에는 반드시 닷새 동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제물(祭物)[具修] 씻고,
장만하는 일도 반드시 직접 살펴서 비록 병이 들었어도 절대 고치지 않았다.
형님을 섬길 때는 매우 공경스럽게 하였고, 친족을 대우할 때도 매우 화목하게 하였다.
이웃과 지낼 때는 훌륭한 사람과 벗하고 불초한 사람은 긍휼이 여겼으므로
모두가 그를 좋아하였다.
공은 문화류씨로 고려의 대승(大丞)을 지낸 차달(車達)의 후손으로
근래 들어 그 가문 출신으로 현달한 사람이 부제학을 지낸 희저(希渚)로
바로 첨정 공의 조부가 되고, 감찰을 지낸 용공이 첨정 공의 아버님이 된다.
류준 공은 태종대왕의 후손인 증(贈) 부원군 경록(慶祿)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부인은 먼저 세상을 떴으나, 공이 졸하자 영암군 청풍원에 묘를 새로 장만하면서 합장하였다.
부인은 여자의 덕을 모두 갖추었고, 남의 곤궁함을 불쌍히 여겨서,
가산의 많고 적음을 계산하지 않고 도왔다. 네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현감(縣監) 벼슬을 지낸 성오(誠吾)이고, 다음으로 교위(校尉) 벼슬을 지낸 신오(愼吾),
생원(生員) 창오(昌吾), 진사(進士) 형오(亨吾)이다. 손자 상운은 지평(持平) 벼슬을 지냈고,
상재(尙載)는 진사로 모두 현감 성오의 자식이다. 사위는 신섬(申暹), 이징선(李徵善)이다.
상보(尙輔), 득보(得輔), 상로(尙輅), 상휘(尙翬)는 교위 신오의 자식이고, 사위는 조성한(趙晟漢)이다.
생원 창오의 사위는 이진명(李晉命)이며, 진사 형오의 사위는 곽수징(郭壽徵), 조일성(曺一成),
윤형미(尹亨美)이고, 그 외 자제들은 모두 어리다.
지평 상운은 공이 “《중용(中庸)》은 사서의 가장 지극한 경지에 있는 책이니
마땅히 먼저 《중용장구(中庸章句)》를 읽고, 그 내용 가운데 의문가는 것을 고민한 뒤에야
의심을 가지고《중용혹문(中庸或問)》 등 여러 글을 읽어야 한다. 이것은 《대학(大學)》
에서 주자(朱子)가 말씀하셨던 것이다”라고 한 말을 외우고 다녔으니, 그 지식과 식견의
정밀함과 성실함이 이와 같았으니, 한 지역의 종사(宗師)가 됨이 마땅한지고! 그가 사교(
四矯)라는 호를 지은 것도 분명히 그 사이에 사서의 뜻이 없어졌어도 마음속으로 이해한
것에서 나온 것이니, 이것은 더욱 높이 살만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배워서 방법을 알고 그 의리를 실천하였도다.
또한 가르쳐서 발전시키고 갖추게 하였노라.
살아서는 학도들이 찾았고 죽어서는 학도들이 제사 모셨으니,
훌륭하게도 많고 많아라, 남방의 배우는 이들이여!
은진 송시열 지음, 자손 가선대부 평안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상운 삼가 씀
숭정기원후 55년 월 일 세움


有明朝鮮國通訓大夫行尙衣院判官柳公之墓
淑人完山李氏祔左
柳公浚字澄源自號四矯壯歲休官闢精舍敎授于羅
州之茅山其諭學者之言曰學問之道無他爲子而孝
爲臣而忠夫婦而別長幼朋友而信與序是也又曰嚴
師在前經籍是也勁敵在內物慾是也其言有理而又
規繩甚備故從遊者甚盛崇禎辛丑年七十八而卒于
九月初六日門從持服送葬旣又立祠于社而俎豆之
後十二年孫尙運以侍從官奉使南方以其尊君命狀
其行以謁余銘其狀曰公孝友之行出於天性其考僉
正公諱夢翼病鍼剌公五歲驚呼而進願以身代僉正
公遂書嘉賞語于紙上曰天生孝子僉正公沒公八歲
每獨處輒呼爺號泣母夫人愍其疾強以薑桂泣不肯
聽二十三陞上舍莊重寡言不喜浮華泮中咸推重焉
天啓癸亥 仁祖反正先是廢朝十五年縉紳章甫汨
於利論附會邪議者京外靡然 改玉日亟選守身不
汚者授公以金吾郎用扈從勞陞主簿以親老不自克
鮮官歸養母夫人疾欲斫指進血及喪毁幾滅性日繞
墓哀省宵寐精誠慈顔感通則輒推枕而哭於墓南有
丙穴之嘉母夫人嗜而公終身不忍食甞築室墓側以
沒其世自奉甚薄而奉先洗腆執事婢僕必用其修累
者忌日必五日齋素滌濯具修必親監視雖疾病未甞
改也事伯氏甚謹待宗族極其睦鄕黨之間賢者友之
不肖者矜之故俱不先歡心焉公文化人高麗大丞車
達之後近世顯者副提學希渚爲僉正公祖而監察用
恭爲考也公娶 太宗世孫 贈府院君慶祿之女也
先沒而祔葬于靈巖之淸風院新兆女德具備恤人之
窮不計家有無四男長縣監誠吾次校尉愼吾生員昌
吾進士亨吾孫尙運持平尙載進士縣監出女婿申暹
李徵善也尙輔得輔尙輅尙暈校尉出女婿趙晟漢也
生員女婿李晉命進士女婿郭壽徵曺一成尹亨美餘
幼持平誦公之言曰中庸是四書極致處湏先讀章句
章句有疑然後方讀或間諸書此於大學書朱子嘗言
之矣其知見精實如此一方之宗師也宜哉其四矯之
號亦必於其間有泯然會於其心者也是尤可尙也銘
曰學以知方以行其義又以爲敎展也備矣存而皷篋
沒而祭社嘉哉莘莘南方學者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 尙運謹書
崇禎紀元後五十五年 月 日立

유명조선국통훈대부행상의원판관류공지묘
숙인완산이씨부좌
류공준자징원자호사교장세휴관벽정사교수우나
주지모산기유학자지언왈학문지도무타위자이효
위신이충부부이별장유붕우이신여서시야우왈엄
사재전경적시야경적재내물욕시야기언유리이우
규승심비고종유자심성숭정신축년칠십팔이졸우
구월초륙일문종지복송장기우립사우사이조두지
후십이년손상운이시종관봉사남방이기존군명상
기행이알여명기상왈공효우지행출어천성기고첨
정공휘몽익병침랄공오세경호이진원이신대첨정
공수서가상어우지상왈천생효자첨정공몰공팔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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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사 상운근서
숭정기원후오십오년 월 일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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