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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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금석문 영암읍

통덕랑 이감 묘비

주  소
영암읍 송평리 산54
건립연대
병자 4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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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덕랑 경주이씨 이감의 묘
배위(配位) 공인 함양박씨 합장

통덕랑 경주이씨 이감의 묘비
부군의 휘는 감으로 자는 전해지지 않고
죽운(竹雲)을 그 호로 하였다.
우리 이씨의 계보는 경주에서 나온 것으로
신라 때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인 알평(謁平)공이 시조이다.
신라~고려에 걸쳐 대대손손 고관의 지위를 세습하였다.
고려말에 동암이 호요, 시호가 문정인 휘 진(瑱) 공이 있었으니,
관직은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이르렀다.
진 공이 휘 제현(齊賢) 공을 낳았으니, 제현 공은 호가 익재(益齋)요
시호가 문충(文忠)이다. 네 차례나 재상부에 올랐고 계림군(鷄林君)으로
책봉되었으며, 문장과 도덕이 세간에 널리 퍼졌다.
제현 공의 3대손이 우리 조정에 들어왔으니 휘는 담(擔),
관직은 대언(代言)에 이르렀다.
담은 휘 희(嘻)를 낳았으니 희의 호는 청호(淸湖)이며,
사헌부(司憲府) 소속의 직책으로 추천[南臺] 받았으며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냈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다.
공의 고조는 휘가 문환(文煥)이고 관직은 제학(提學)에 이르렀다.
증조는 휘가 흔(訢)이니 관직이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조부는 휘가 우건(友騫)이니 관직은 도사(都事)에 이르렀다.
부친의 휘는 대(岱)로 관직은 사인(舍人)이었으며,
처는 숙인(淑人) 청주 한씨 승우(承祐)의 따님으로
규범(閨範, 부녀자의 도리)이 있었으며, 병오년 9월에 공을 낳았다.
공은 본성이 총명하였으며 재주는 남보다 나아 기량이 컸으니,
가정의 영향을 받아 학문을 일찍 성취하였고,
상제(喪制)를 전후하여서는 그 의례에서 정해진 것을 잘 따랐다.
부친의 명으로 관직 생활에 뜻을 접고 강호에 은둔하고
문을 걸어 잠근 채로 세속을 사양하였으며,
시와 술을 즐기는 일에 마음을 붙였고 영욕(榮辱)을 다 잊고서
누차 징소되어도 나아가지 않아 자급(資級)은 통덕랑에 그친 채로
갑인년 4월에 졸하였으니, 묘는 영암군 서면(西面) 경동(鯨洞) 신좌(辛坐)이다.
부인은 공인(恭人) 함양 박씨로 아들 확(確)은 효행이 있어서
당시 사람들이 그 효를 칭송하였다. 후처는 광산 김씨이다.
아들 둘을 두었으니 장남은 만종(萬種)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사과(司果)가 되었고, 차남 극종(克種)은 품은 뜻과 올바른 행실이 있었다.
증손 언수(彦壽)는 무과에 급제하였고 군자감(軍資監) 정(正)에 증직되었으며,
다음 휘(輝)는 학행(學行)이 있어서 세간에서 백운처사(白雲處士)로 칭해졌다.
그 이하의 자손이 많으므로 다 기록할 수 없다.
아아! 부군께서 태어나신지 이제 300여년이 지났는데
당시에 어진 스승과 훌륭한 벗을 두어 세상을 노닐었고,
행실이 특출나서 후세에 드러난 것이 분명히 많았다.
그러나 가문이 침체하고 자잘한 행실들은 산일되고
전하지 않게 되어 문헌으로 징험할 것이 없게 되었다.
자세한 대수는 문중 장로(長老)의 구전이고 그 행적은
개략적인 것만 들어 놓은 것이 이와 같으며,
그 후손에 대해 말한 것도 선대의 부침을 면치 못하여
사라져 탄식하게 되었으므로, 추모함에 얼굴을 가리고 눈물로 기록한다.
해는 병자년 4월 하순, 후손인 상욱(相旭) 삼가 지음
함평 후인(后人) 이민창 삼가 씀


通德郞慶州李公諱汵之墓(통덕랑경주이공휘감지묘)
配恭人咸陽朴氏 雙窆(배공인함양박씨 쌍폄)

通德郞慶州李公諱汵之墓碑(통덕랑경주이공휘감지묘비)
府君諱汵字失傳竹雲其號也我李系出慶州羅朝佐命功臣謁平爲上祖
羅麗子子孫孫世襲簪組麗季有東庵諡文定諱瑱官至檢校政丞生諱齊
賢號益齋諡文忠四登相府封鷄林君文章道德連綿爀世間三世入我
朝諱擔官代言生諱嘻號淸湖南臺吏議 贈吏判高祖諱文煥官提學曾
祖諱訢官成均館大司成祖諱友騫官都事考諱岱官舍人妣淑人淸州韓
氏承祐女有閨範生公于丙午九月日公性本聰敏才越器宏擩染家庭學
問夙就前後喪制奠哭儀節以父命絶意仕宦屛跡于江湖杜門而謝世詩
酒寓懷榮辱俱忘累徵不起資通德郞卒于甲寅四月日墓在靈巖郡郡西
面鯨洞辛坐原配恭人咸陽朴氏子確有孝行時人稱其孝配光山金氏子
二男長男萬種武司果次男克種有志行曾孫男彦壽武 贈軍資監正次
輝有學行世稱白雲處士以下多不能盡記嗚呼府君生今去三百餘年當
時賢師良友之遊蹤卓異之行著於後世者必多矣門戶零替細行類車丑逸
不傳文獻無徵其善行異蹟代世門長老之口傳槩擧其大者如此而謂其
(부군휘감자실전죽운기호야아이계출경주나조좌명공신알평위상조
나려자자손손세습잠조려계유동암시문정휘진관지검교정승생휘제
현호익재시문충사등상부봉계임군문장도덕련면혁세간삼세입아
조휘담관대언생휘희호청호남대이의 증이판고조휘문환관제학증
조휘흔관성균관대사성조휘우건관도사고휘대관사인비숙인청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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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우회영욕구망누징불기자통덕랑졸우갑인사월일묘재영암군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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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유학행세칭백운처사이하다불능진기오호부군생금거삼백여년당
시현사양우지유종탁이지행저어후세자필다의문호령체세행유축일
부전문헌무징기선행이적대세문장노지구전개거기대자여차이위기)

後孫者未免浸 先之責湮沒之歎故追慕掩涕而記識
(후손자미면침 선지책인몰지탄고추모엄체이기식)
歲丙子四月下澣後孫相旭謹識
(세병자사월하한후손상욱근식)
咸平后人李敏昶謹書
(함평후인이민창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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