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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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금석문 시종면

효자 김하주 기사비

주  소
시종면 금지리 104-6
건립연대
신미 중춘(1931년 2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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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야은 김하주의 기사비(紀事碑)

찬(贊) 효자 김공 기사(紀事)
순임금의 대효(大孝)는 단지 ‘돌아가신 어버이를 그리워 하였다’고 하고, 증자의
지효(至孝)는 단지 ‘부모의 뜻에 잘 맞추었다’고 한다. 효(孝)란 별다른 일이 아니고
오직 이러한 것을 말할 뿐이다. 이제 성인의 시대와는 멀어져 풍속이 침체되었고,
부모를 모시는 자는 몇 사람뿐이니,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이 그냥 오래된
것이 아니다. 다행히 낭북(朗北)에 효자가 있으니, 김하주(金夏冑)로 가락국의
후손이다. 그 선조의 덕은 높이 칭송받았다. 곧 고려 때의 휘 탁(琢) 공은 관직이
시중(侍中)에 이르렀고, 우리 조선 조의 휘 천해(千海) 공은 관직이 예빈경(禮賓卿)
에 이르렀고, 휘 수항(壽恒) 공은 관직이 이조참의(吏曹叅議)에 이르렀다. 고조는
휘 정서(鼎瑞) 공은 생원이었고, 부친은 휘 병선(秉璇) 공이다.
대대로 효성과 우애를 전수하여 예천(醴泉)의 근원이 되었으니, 효자가 태어남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전해 받음이 중후하고, 성품은 어질고 선량하니, 가르치지 않아도
능히 부모를 모시는 법도를 행하였다. 삼례를 배우지 않았어도 능히 부모를 대하는
몸가짐의 법도를 알았으니, 이것은 어렸을 때의 일이다.
장성해서는 직접 고기잡이하고, 나무하는 일을 감당해냈고, 맛있는 음식을 끊지 않고
계속해서 부모에게 올렸다. 혹여 부모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약을 마련해 올리고,
하늘에 빌기를 밤낮으로 하여 틈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연이어 누차 친상(親喪)을
당하자 슬퍼하기가 정도를 지나쳤고, 몇 번이나 기진하여 죽을 위기에 이르렀다. 염빈(
歛殯)은 물론 상례를 마치기까지 영전에 음식을 올리는 일과 같은 것은 언제나 유감이
없도록 하였다. 장례 절차를 모두 마치는 동안 관을 매장할 때부터 봉분을 조성할 때까지
살피는 일을 비바람이 불어도 폐하지 않았다. 상례를 치르는 6년 동안 처음과 끝을
똑같이 하였다. 때가 되면 정성과 직분을 다하여 기약하기를 마치 부모님이 살아 계신
것처럼 하였다. 평상시에 남이 부모의 옛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으면 과연 목이 메어
얼굴을 가리고 울었고, 그로 인하여 늙어서 센 머리가 눈이 온 듯하였다. 부모의 뜻에
잘 맞추었다고 할만하고, 돌아가신 어버이를 그리워했다고 할 만한 행실이니, 하물며
추모하는 정성의 독실함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선영(先塋)에 혹 이롭지 못한 것이 많을까 두려워하여 감여사(堪輿師)를 초빙하자, 그들이
다섯 가지 근심거리가 없는 지역을 두루 구하였는데, 조상의 묘에 대한 풍수[此安彼安]
를 공부한 사람이라고 할만하였다. 소옹(邵雍)의 학문[百源]이 다 갖추었어도 기필코
자세히 할 것은 아니었으나, 그는 일상적으로 남을 대할 때에는 너그러웠고,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마치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것처럼 하였으며, 남을 도울 때는 남이 자기
때문에 위험에 빠진 것처럼 급박히 하였으니, 효사(孝思)가 인(仁)에 들어맞는 것이 파도가
흘러넘치는 것과 같았으니 효성스럽도다!
이웃 사람이 감응하고 부인네들도 유전(儒傳)을 읊으니, 이미 학식과 덕망으로 추천장에
올랐으나 표창할 곳 없으니 누가 애석해하지 않겠는가? 비록 홍살문까지는 세우지 못하게
되더라도 간략하게나마 명문을 새기고 선비의 예에 따라서 비석을 세워 후세에 전하려는
뜻이다. 그 효성스러운 가문의 후예 대관(大寬)이 유림의 논의를 중심으로 하였고, 아울러
그 일에 대한 문자를 특별히 적어 덧붙이니 바로 사람이 벼리가 된 것이다. 속세에서 효를
잊은 사람들에게 생각건대 많은 모범이 될 것이니, 퇴락한 풍속에는 어떠하겠는가?
그를 위하여 찬(贊)할 말은 다음과 같다.
효도에 대한 일은 섞임이 없이 한결같았고, 겸비한 행동은 여섯 가지였네.
자신을 잊고 힘을 다하여 부모님이 하고자 하는 뜻에 맞추었네.
봉양하면서 기뻐하였고 병구완하면서는 근심하였도다.
상례(喪禮)며 제례(祭禮)는 슬퍼함과 공경함이 깊고 두터웠도다.
사람들이 유감이 없을 것이라 하여도 스스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노라.
하늘은 높고 크니, 우러러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노라.
한 사람이 벼리를 이루어 세상에 큰 보탬 되었더니라.
떳떳한 본성이란 모두 같은 것, 누구인들 감복하지 않으랴?
어디에서 표창하랴? 표창할 곳 없구나.
비문이 짧다 말하지 말라. 가히 홍살문에 비할 만하도다.
바다와 호수처럼 깊고 깊으니 활을 쏘아도 벗어남 없는 것이다.
신미(辛未) 2월 일, 가선대부 예조참판 연봉 홍종소 삼가 지음
성주 이성원 삼가 씀.

孝子野隱金公夏冑之紀事碑
贊孝子金公紀事
虞舜大孝也止曰孺慕曾聖至孝也止口適志孝非別事惟此而己及今聖遠風寢事
親者凣幾人不惟不見不聞久矣向幸朗北有孝字金夏冑駕洛後葉也其先德之顯
稱者則勝朝有諱琢官侍中本 朝有諱千海官禮賓卿諱壽恒官吏曹叅議高祖諱
鼎瑞生員考諱秉璇世以孝友授受醴泉所源孝子之生不亦宜乎軆賦厚重性度仁
良不有爲敎而能行定省溫淸之節不學經禮而克知怡愉承順之道此幼穉時事也
及長躬當漁樵繼甘勿匱親或靡寧供藥祝天霄旰不遑輒見屢數丁憂也擧擗過制
幾至滅性歛殯若饋奠諸儀在在無憾樹襄後朔朢渻墳不風雨廢執制六年如始如
終及夫辰殫誠盡分期致如在於平常時聞人說父母遺事未嘗不哽咽掩涕老白首
靡寒可曰適志可曰孺慕 況復追誠湥篤懼夫先隧之或多不利聘堪輿師遍求五患
以外之地可謂學北安彼安之語者也百源備矣不必纖悉然其日用蒜事則接人以
寬弘好學如膾炙急人若推納莫非孝思中仁波所漲溢孝哉若人鄕隣感艶婦儒傳
誦旣登剡薦無地可旌孰不恨惜雖不得亦角更制畧效刻銘士例以竪石傳世之意
其孝胤大寬爲是經紀儒論幷附特書紀事字乃人紀也俗之忘孝者想多模範矣回
挽頹俗果何如爲之贊曰
孝事純一兼備行六忘身竭力適親嗜欲養而怡悅病而憂色喪也祭也哀敬穿篤人
曰無憾自謂不足昊天高大仰不愧怍一人挈綱大補諡俗秉彝攸同孰不艶服于何
褒彰制無旌淑莫曰石短可比赤角海湖湥湥矢之木忒
辛未中春日 嘉善大夫禮曹叅判硯峯洪鍾韶謹撰
星州李成洹謹書

효자야은김공하주지기사비
찬효자김공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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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자범기인불유불견불문구의향행낭북유효자김하주가락후엽야기선덕지현
칭자칙승조유휘탁관시중본 조유휘천해관예빈경휘수항관이조참의고조휘
정서생원고휘병선세이효우수수례천소원효자지생불역의호체부후중성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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