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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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금석문 시종면

경암처사 강검수 묘비

주  소
시종면 신연리 1469-1
건립연대
신사 4월(1941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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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암처사 강검수의 묘

배위(配位) 유인 경주김씨 합장
경암처사 묘갈명 병서
예부터 군자는 조정에 들어가 임금을 진작시키고 백성에게 은택을 이르게 하였고,
조정에 들어가지 못하면 수신하며 의를 실천하였다. 그 행적의 세세한 부분은
비록 갖지 않은 부분이 있더라도 도, 덕이 유명무실하면 더벅머리가 되어 살게
된다. 그래서 높은 벼슬과 지위는 세상을 논하기에 부족하고 곤궁함에 빠졌다고
하여 간단히 그 사람을 말하기도 충분한 것이 아니다. 경암처사 강공은 남쪽
향리의 선배 유학자이다.
해산 남쪽에 은거하며 도를 즐기고 덕을 닦아 고금의 성현의 학문을 그 일신의
부적처럼 여겼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입에서는 외우기를 멈추지 않았으니,
성(聖), 현(賢), 우(愚) 등 인간의 세 등급과 도, 예 등 학문의 두 등급에 대하여
항상 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비는 차라리 10년 동안 밭을 갈지 않을 수는
있어도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아서는 안 되고, 차라리 10년 동안 책을 읽지 않을
수는 있어도 하루라도 소인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문하에 종유하던 이들
가운데 단정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노사 기정진 선생 문하에서 집찬하면서 지조
있는 행동이 청렴하고 정결하였고, 소리를 크게 내지 않았으며 효성으로 일가를
이루어 부모를 모셨다.
선비를 기르고 죽은 자를 보내는 예절은 공경스럽고 마음을 지킨 것이었으며,
세상에 대처할 때는 속세의 때에 물들지 않게 하여 저자에 이르지 않았고,
친척들과는 화목하게 지내고, 웃어른을 대할 때에는 신중히 하였으며, 친구를
대할 때에는 멀리서 가까이에서 오는 이가 있을 때마다 항상 웃으며 맞이하였다.
수업에는 명확한 가르침을 주었으므로, 그 문하에서 유학자들이 많이 나왔으니
한 지역의 사표가 되었다. 그래서 효성과 우애는 가문을 훌륭하게 하고, 자손은 그
공경함을 따랐으니 향촌에 개체한 기풍이 일었고, 벗은 그 의리에 복종하였다. 암장(闇章)
과 잠소( 潜昭)의 빛이 몸에 이른 것이 오래 되었어도 잊을 수 없었다.
아아! 세상 사람들이 시험 삼아 포부와 재주를 펼쳐 한 시대의 공업을 이루어 영광스럽게
되는 것을 알면서, 도를 지키고 의를 실천하여 남을 이롭게 하고, 풍속을 훌륭하게 함이
막힘 없는 공이 되어 작게는 다함이 없는 보답이 되어 자손이 마땅히 그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모른다.
아들 중 큰아들 형초(衡草)가 공이 남긴 사적을 가지고서 비명과 비갈을 쓰는 일을 나에게
청하여 그 행적을 드러내어 기록하게끔 부탁하였는데, 사양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그 집안의 문서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공의 휘는 검수(儉秀), 자는 재봉(齊奉)이며, 진주(晋
州)가 관향으로 고려 조에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낸 휘 사첨(師瞻) 공이 조상이 된다. 휘
창귀(昌貴) 공은 진원부원군(晋原府院君)에 책록되었고, 휘 군보(君寶) 공은 예문관(藝文
館) 대제학을 지냈고 시호가 문경공(文敬公)이다. 휘(諱) 저(著) 공은 삼중대광(三重大匡)
상의문하찬성사(商議門下贊成事)를 지냈으며, 휘 회백(淮伯) 공은 호가 적정(適亭)으로
성균제주(成均祭酒), 밀직제학부사(密直提學副使)를 역임하였으며, 포은(圃隱) 정몽주(鄭
夢周),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목은(牧隱) 이색(李穡) 세 선생과 함께 호복을 혁파하고
화복(華服)을 도입하자는 건의를 올렸으며, 우리 조정에 들어서는 숭정대부 겸 의금부사
(義禁府使),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에 증직되었으니 이분이 공의 조상
가운데 명성이 높으신 분이다. 고조(高祖)는 휘가 빈환(彬煥)이고, 증조는 휘가 재중(在
重)이며, 조부는 휘가 서회(瑞會)이다. 부친은 휘가 영우(永佑)인데, 그 성품이 순후하고
효행이 독실하였다. 부인은 광산 노씨(盧氏)로 그 부친은 병렬(炳烈)이다.
철종 갑진년 9월 14일, 공은 나주 종남면(終南面) 이화촌(李花村) 집에서 태어났다. 공은
고종 임술년 5월 24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78세이다. 묘는 영암 시종면(始終面) 월농리(
月弄里)에 있으며 좌향은 무등(鵡嶝)에 임좌(壬坐)이다. 부인은 경주김씨로 참봉을 지낸
찬태(燦泰)의 따님이니, 신축년에 태어났으며, 계해년 1월 17일에 졸하였으니 묘는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대련(大連)이고 작은아들은 대형(大衡)
인데 숙부인 후(后)의 집안으로 입후되었다. 딸은 경주 최씨 최기선(崔基善)에게 시집갔다.
손자로는 기원(基遠), □원(□遠), 광원(光遠)이 있으니 장남의 소생이고, 또 희원(熙遠),
응원(應遠), 계원(桂遠), 종원(鍾遠)이 있으니 차남의 소생이다. 그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진양(普陽)의 고귀한 집안, 통정공(通亭公)의 귀한 후손이로다.
변치 않고 다툴 자 없이 문무(文武)에 모두 인물 내었지.
경학(經學), 예학(禮學)을 가업으로 여겼으며,
후손은 효성 있고, 우애 있으니 연원(淵源)이 고귀하였노라.
오산(鰲山)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선생과 글 보며 도를 즐겼고,
경(敬)을 위주로 하여 수신하였으니, 쌓여도 먹지 않았으니 자손이 복을 입었네.
교화가 길이 가니, 사우가 다 상복을 입었도다.
그 명성 천년을 가리니, 앉아서 무(鵡)의 기슭에 이르겠네.
해는 신사[光大荒落]년 3월[暮春] 곡우(穀雨)에 평양의 조덕현(趙德顯)이 삼가 지음
성주(星州) 이성원 삼가 씀. 신사 4월 일

敬菴處士姜公儉秀之墓
配孺人慶州金氏祔
敬菴處士墓碣銘幷序
上君子立於朝則致君澤民不得於朝則條身行義此其大小廣狹雖若不同而所以爲
道德無室髮養殊也是以崇高顯揚不足以論其世沉淹窮戚不足以簡其人敬菴處士
姜公錦南鄕先進也隱居海山之陽樂道修德以古今賢聖之學爲其一身之元符而手
不禪卷口不絶誦以聖也賢也愚也之人三等道也禮也之學二等說常語人曰士者寧
可十年不耕不可一日不讀書寧可十年不讀書不可一日近小人從遊於端人正士執
贊于奇蘆沙先生之門操行廉潔不要聲聞孝以成家而事親也克盡養土送死之節敬
以持心而處世也身不染風塵足不到城市於族戚成和睦於長老愼應對於朋友致切
傯遠近方頁笑愛業而名士聲儒多出其門可焉一鄕之師表也然而孝友之實善於家
而子孫遵其敬愷悌之風動於鄕而朋友服其義闇章之光潜昭之輝至於身放之久而
不能忘焉嗚呼人知試抱展才榮耀一時之焉功而不知守道行義利人善俗爲無坊之
功小乎不僉之報子孫當業其福也肖胤大衡草公遺蹟以銘碣之役來請以德顯記之
辭而不獲謹按家狀公諱儉秀字齊奉晋州人以麗朝監察御史諱師瞻焉上祖諱昌貴
晋原府院君諱君寶藝文館大提學諡文敬公諱著三重大匡商議門下贊成事諱淮伯
號適亭成均祭酒密直提學副使與圃隱鄭夢周陶隱李崇仁牧隱李穡三先生建議革
胡服襲華□入 我朝 贈崇政大夫兼義禁府使五衛都摠府都摠管是於公顯祖也
高祖諱彬煥曾祖諱在重祖諱瑞會考諱永佑性純孝行篤妣光山盧氏父炳烈 哲宗
甲辰九月十四日公生于羅州終南面李花村第 高宗壬戌五月二十四日卒享年七
十八墓在靈岩始終面月弄里坐鵡嶝壬原齊慶州金氏叅奉燦泰女辛丑生癸亥正月
十七日卒墓在公原祔育二男一女男長大連次大衡系出叔父后女適慶州崔基善孫
男基遠□遠光遠長房出熙遠應遠桂遠鍾遠季房出餘不悉錄銘曰
普陽右族通亭華冑無替無競乃文乃武箕裘詩禮家庭孝友淵源有達鰲山蘆翁看書
樂道主敬修躬積累不食子孫蒙福敎化永在士友咸服芬苾千載坐鵡之麓
歲重光大荒落暮春穀雨節平壤趙德顯謹撰
星州李成洹謹書 辛巳四月 日

경암처사강공검수지묘
배유인경주김씨부
경암처사묘갈명병서
상군자립어조칙치군택민부득어조칙조신행의차기대소광협수약부동이소이위
도덕무실발양수야시이숭고현양부족이론기세침엄궁척부족이간기인경암처사
강공금남향선진야은거해산지양낙도수덕이고금현성지학위기일신지원부이수
불선권구부절송이성야현야우야지인삼등도야예야지학이등열상어인왈사자녕
가십년불경부가일일불독서녕가십년부독서불가일일근소인종유어단인정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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