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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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금석문 신북면

효자 민재식 비

주  소
신북면 살곡리 산 129-6(들소리로 320-14)
건립연대
무진 3월(1928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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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여흥민씨 민재식의 비

처사(處士) 만취공 사실(事實)
처사 만취공(晩翠公)이 졸하자 호남의 사람들 가운데 공을 알고 모르고를 막론하고 모두
놀라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여기서 그친단 말인가? 풍속이 어지러운데 누구에게
의뢰하여 바로잡을 것인가? 후배들은 누구를 찾아 법도를 익힐 것인가?”라고 하며
한마디로 애석하게 생각하니, 이것이 어찌 덕을 쌓은 군자가 아니겠는가? 살펴보니 공의
휘는 재식(宰植)으로 자는 상삼(相三), 만취(晩翠)는 그의 호이다. 성은 민씨로 관향은
여흥이며 나와는 동족이다.
휘가 칭도(稱道)라는 분이 있는데 고려 조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상의제거(尙衣提擧)
에 이른 분으로 바로 우리 집안의 비조(鼻祖)이시다. 3대손으로 휘가 영모(令謨)인 분은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고 시호가 문경공(文景公)이다. 또 그로부터 4
대손으로 휘가 지(漬)라는 분은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에 책록되었으며 시호가 문인공(
文仁公)이다. 또 그로부터 3대손은 휘가 중립(中立)으로 중정대부(中正大夫)를 지냈으며,
고려 조의 사직이 망할 때 절개를 지키면서 스스로 고요하게 살았으니, 우리 조정에서
그 충성을 포상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 대사헌(大司憲)에 제수하였다. 이분이 아드님
대생(大生) 공을 낳으셨으니, 중추부사(中樞副使)로 후에 우의정에 증직 되었으며, 또
대생 공이 효환(孝懽) 공을 낳았으니, 이 분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掌令)이 되셨으며,
바로 만취공의 16대조가 되신다. 만취공의 증조부는 휘가 성달(馨達)로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증직 되었고, 조부는 휘가 석환(錫煥)으로 호조판서(戶曹叅判)에 증직
되었다. 부친은 휘가 영장(泳長)으로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며, 공조참판에 제수되었으니 그때의 전례였다. 부인은 나주정씨 정덕운(鄭德運)의
따님이다. 고종 정축년 3월 18일 공을 낳았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하였고, 효서와 우애는 타고난 성품이었다. 아이 때 모친이 병을
얻었는데 어쩌다 달을 넘겨 일어나지 못하자, 공이 조금도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며
몸소 약을 올리고 병이 나은 뒤에야 그만두었다. 부친이 일찍이 맹수에게 잡혀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공은 나이가 17~18세였음에도 울면서 그 맹수를 쫓아내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따라가 끝내 탈환하여 왔다. 공이 백방으로 간호하며 변까지 손수 씻어내며 해이하게
행동하지 않았으니, 본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점점 자라서는 학문에 힘쓰고 그것을 실천하는 경지에 나아갔는데 사람들이 큰 난리에
임하여 큰 절개를 확립하여 처신하는 것을 볼 때마다 세 번 다시 울지 않은 적이 없었고,
몹시 분통하며 자신으로 그 처지를 대신하고자 하였다. 부모를 모심에 있어서는 그 성심을
지극히 하였으니, 아침저녁으로 잠자리를 살폈고, 반드시 제때 맛있는 음식을 올렸으며,
어쩌다 빠지는 경우가 없었다. 양친이 혹시 불시에 어떤 것을 생각하면 성심으로 구하여
끝내 얻어서 올렸다. 집안을 돌볼 때는 제도가 분명하였고, 남을 대할 때는 화락한
기운으로 온화하게 대하였다. 이웃의 자제들이 어쩌다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그 집안
어른들이 반드시 공의 행동을 들어서 법도로 삼도록 하였다. 그가 향촌에 보인 신의가
이와 같았다.
임자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슬픔에 지쳐 몸을 상했으나 부친이 계실 때는 함부로 감정을
따라 아파하지 않았으며, 슬퍼함을 절제하며 상제를 치렀으니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
禮)》를 따라서 실천하였다. 기유년에 나라의 일이 어수선하고 인심이 격발되어 곳곳에서
무리를 모아 의병을 칭하며 멋대로 노략질하였다. 이때 공의 향리에도 그 움직임이
미쳤는데, 공이 밤에 부친을 모시고 30리를 달려가 화를 면하자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
효를 칭찬하였다.
병인년 9월, 나병에 걸려 죽게 되자 아우 안식(顔植)의 손을 잡고 울며 말하기를 “
팔순의 늙은 아버님이 계시는데 끝까지 모시지 못하니 세상에 큰 죄인이 되었구나. 네가
날 대신하여 잘 봉양하여야 내가 죽어서도 눈을 감는다”고 하고 끝내 세상을 떴으니,
발병한지 22일만의 일이었다. 영암군 신북면(新北面) 갈곡(葛谷) 자좌(子坐)의 자리에
매장하였다. 첫 부인은 원주 이씨 복흠(復欽)의 따님으로 자식이 없었고, 두 번째 부인은
남평 문씨 재풍(在豐)의 따님이다.
4남 3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병철(丙徽)이고, 차남은 병천(丙天)인데 요절하였고,
삼남은 병유(丙鏐), 사남은 병현(丙鉉)이다. 해남윤씨 윤중현(尹重鉉), 나주나씨 나기수
(羅琪洙), 울산김씨 김대수(金大洙) 세 사람을 사위로 삼았다. 공은 은거하면서도 의를
실천하였으니 후세에 본보기가 되는 것이 많았다. 공의 여러 자식이 나에게 잊히지 않을
글을 부탁하므로 나의 쇠락함을 돌아보아 그 덕을 잘 알리기에 충분하지 않으나, 동족의
일이니 의당 의리상 사양할 수 없어서 삼가 짓고 이처럼 말할 뿐이다.
해는 무진 3월 상순, 자헌대부 장례원경원임 규장각학사 종중 후손 경호 삼가 지음

孝子驪興閔公宰植之碑
處士晩翠公事實
處士晩翠公卒湖南人士無論知不知皆驚歎曰斯人止於斯耶風俗淆醨誰頼
而矯之後生模楷
何從而取之一辭同然此豈非宿德之君子乎按公諱宰植字相三晩翠其號姓
閔氏貫驪興與下
侫同族也有諱稱道仕高麗官至尙衣提擧實爲鼻祖三傳諱令謨門下侍中平
章事諡文景公又
四傳諱漬驪興府院君諡文仁公又三傳諱中立中正大夫麗社屋守節自靖
我朝褒其忠 贈
資憲大夫大司憲生諱大生中樞副使 贈右相生諱孝懽文科掌令於公十六
世也曾祖諱馨達
贈承政院左承旨祖諱錫煥 贈戶曹叅判考諱泳長以蔭進壽階嘉善授工曹
叅判時典也妣羅
州鄭氏諱德運之女也以 高宗丁丑三月十八日生公公生而聰慧孝友根天
髫齔時母夫人有
貞疾或踰月不能起公暫不離側躬煎藥餌至疾止而後已其大人嘗爲猛獸所
攫公年十七八號
哭追逐里人從之遂得奪還公百方救護便屎手自滌洗須臾不懈觀者莫不感
歎稍長就傳力學
實行見古人臨大亂立大節處未嘗不三復流涕慨然若身處其地者事父母極
其誠定省溫凊必
以其時甘旨之供無或有闕親或思不時之物誠心求之竟得以進治家制度斬
然接人和氣藹然
隣里子弟或不遵訓誨則父兄必擧公之行而使取法焉其見信於鄕黨有如此
者壬子遭內艱毁
幾滅性以嚴君在不敢率情忍痛節哀喪祭一遵家禮而行之歲己酉國事波蕩
人心激發在在聚
羣號爲義兵肆行劫掠方及公里公夜負嚴君行走三十里以免禍害人嘖嘖稱
其孝丙寅九月罹
疾將殊執弟顔植手泣曰八耋老親不得終養天地間一大罪人也汝須替我善
養我死且瞑目矣
遂恬然逝時二十二日也葬于靈巖郡新北面葛谷子坐之原初配原州李氏復
欽女旡育繼配南
平文氏在豐女擧四男三女男長丙徽次丙天夭次丙鏐次丙鉉海南尹重鉉羅
州羅琪洙蔚山金
大洙三婿也公隱居行義有可以垂法於世者多矣其諸子謁余以不朽之文顧
此衰耗不足以揄
揚懿德其在同族之誼義不敢辭謹撰次如是云爾
歲戊辰三月上澣資憲大夫掌禮院卿原任 奎章閣學士宗下京鎬謹撰

효자여흥민공재식지비
처사만취공사실
처사만취공졸호남인사무론지부지개경탄왈
사인지어사야풍속효리수뢰이교지후생모해
하종이취지일사동연차개비숙덕지군자호안
공휘재식자상삼만취기호성민씨관려흥여하
녕동족야유휘칭도사고려관지상의제거실위
비조삼전휘령모문하시중평장사시문경공우
사전휘지려흥부원군시문인공우삼전휘중립
중정대부려사옥수절자정 아조포기충 증
자헌대부대사헌생휘대생중추부사 증우상
생휘효환문과장령어공십육세야증조휘형달
증승정원좌승지조휘석환 증호조참판고휘영
장이음진수계가선수공조참판시전야비나
주정씨휘덕운지녀야이 고종정축삼월십팔
일생공공생이총혜효우근천초츤시모부인유
정질혹유월불능기공잠불이측궁전약이지질
지이후이기대인상위맹수소확공년십칠팔호
곡추축리인종지수득탈환공백방구호편시수
자척세수유불해관자막불감탄초장취전력학
실행견고인림대란립대절처미상불삼복유체
개연약신처기지자사부모극기성정성온청필
이기시감지지공무혹유궐친혹사불시지물성
심구지경득이진치가제도참연접인화기애연
인리자제혹부준훈회칙부형필거공지행이사
취법언기견신어향당유여차자임자조내간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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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호위의병사행겁약방급공리공야부엄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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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장수집제안식수읍왈팔질노친부득종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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