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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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금석문 시종면

학성군 김완 신도비명

주  소
시종면 만수리 205-7
건립연대
숭정기원후 74년 신사(1701년) 을축 10월 중건(1805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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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이조판서 학성군 김공 신도비명

유명조선 황해도 병마절도사 학성군 증 병조판서 김공 신도비명 병서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 춘추관사 세자전 박세채 지음
가의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 경연사 세자우빈객 조상우 씀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지춘추관 성균관사동지 경연사 최석정 전서
갈성분위진무공신가의대부황해도병마절도사 겸 황주목사 학성군 자헌대부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인 김공의 휘는 완(完)이요, 자는 자구(子具)니
가락국 수로왕의 후예이다. 증조는 한성(漢城)이니 증좌통례요, 조(祖)는 사종(嗣宗)
이니 증공조참의이며 고(考)는 이성현감 증병조판서 학천군 극조(克祧)와 비(妣)는
천안전씨인데 공의 귀(貴)로 인하여 삼대(三代)에 걸쳐 나라의 은전(恩典)을 입었다.
공(公)의 집은 영암에서 세거(世居)한 가문으로서 전부인(全夫人)이 맹호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상서로운 꿈을 꾸고 공(公)을 임신하여 선조10년 정축(1577) 8월 23
일 무인시(時)에 출생하였었는데, 공이 출생할 때 흰 기운이 방안에 가득하였다가
하루가 지난 후에야 흩어지니 사람들이 모두들 이상하게 여겼다. 처음 판서공이
광양현감이 되었을 때가 마침 이발(李潑)이 정여립의 역모에 연루되어 옥사한
뒤였는데 후임 현감인 한덕수(韓德脩)가 은밀히 공(公)이 이발(李潑)로 더불어
인척이 됨을 알고 전직도사 정설(鄭渫) 등으로 더불어 공이 역모를 도왔다고
무고하여 공은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심문결과 아무런 증거가
나타나지 않아 덕수(德脩)등이 도리어 무고죄로 형을 받아 그들 무리 일곱 사람은
모두 죽음을 당하고, 오직 덕수와 설(渫)만이 사형을 감하여 먼 곳으로 유배 되었다.
그리고 판서공은 마침내 무혐의로 석방의 명을 입게 되었으나 불행히도 미쳐
출옥하지 못하고 옥사를 하게 되니 이때 공은 15세의 소년으로서 판서공을 위하여
복수를 맹서, 이와 같은 결심을 하루도 잊지 아니하고 마음속 깊이 간직하였다.
그런데 공이 판서공의 복(服)을 마쳤을 때는 이미 국가가 왜적의 침략을 입어 수년째
난을 겪고 있는지라, 우선 국가를 위하여 왜적을 격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공은
기도(氣道)가 웅위(雄偉)하고 여력(膂力)이 과인(過人)하여 무거운 솥(鼎)을 들어
올렸으며, 활을 쏘는 재주가 또한 뛰어나 정유(丁酉)에 용감한 인재로 선발되어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휘하에 있으면서 이병사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 이해
(1591년) 여름에 무과에 등제하여 공이 근무할 경상방어사 고언백(高彦伯) 군중으로
가던 도중 남원에 이르러 적병에게 길이 막히자 사인 조경남(趙慶男)등으로 더불어
궁장현에서 적을 요격하여 적의 머리 20여급을 참획하고 또한 원내촌에 주둔한 적을
공격하여 적의 머리 10여 급을 참획하였으며, 최후로 혼자서 적을 장치(獐峙)에서
요격하여 적의 머리 수십 급을 참획하였었는데 이때 적이 흘린 피가 반석을 물들여
그 반석의 이름을 혈암(血岩)이라 하였다 하는데 지금도 그 유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듬해(1598년)에 전라병사 이광악(李光岳) 막하로 전속되어 남원에서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때 마침 덕수(德脩)가 도원수 권율(權慄)의 비장(裨將)으로서 이병사의
휘하 군사들을 점검하러 오게 되었다.
이에 공은 은밀히 날카로운 칼을 품속에 품고 기회를 보아 척살(刺殺)하려 하였다가
공의 계획을 덕수에게 누설시킨 사람이 있어 실패하고 말았었는데, 후에 이공이
이와 같은 사실이 있었음을 알고 노하여 그 비밀을 누설시킨 사람을 배척 하였다.
신축(1601년)에 비로소 소파아 권관 겸 단련사(小坡兒權管 團練使)의 임명을 받고
명나라에서 보내온 군량의 운송을 관장하다가 얼마 안되어 정광적(鄭光績)을 따라
경사(京師)로 들어가던 중 명나라 군사들이 표적을 세워놓고 활쏘기 연습을 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었는데, 이때 그들 중 두사람이 각각 세 개의 화살을 적중시키자
관람하던 사람들이 모두들 환호하며 공의 일행에게 묻기를 “그대의 나라에서도
이렇게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있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즉시 대답하기를 “내가
한번 쏘아 보겠다” 하고 드디어 두 사람 몫의 화살을 갖고 나아가 아홉개의 화살을
연속해서 적중시키니 그들은 공의 화살이 적중 할 때마다 감탄의 환호성을 지르며
놀라운 재주라 칭찬하고 성대한 상품을 주었었는데 공은 그들에게서 받은 상품을
모두 일행들에게 나누어 주고 길을 떠났다.
계묘(1603년)에 선전관(宣傳官)에 배(拜)되었고 갑진(1604년)에 금모포 만호(靲毛
浦萬戶)에 제수되었었으며, 정미(1607년)에 남원 판관에 배(拜)되어 재직 중 모친을
봉양하기 위하여 관직을 파하고 집으로 돌아와 전씨부인의 상(喪)을 당하였었는데
공은 이때 울면서 아우인 부사공 우(宇)에게 이르기를 “우리 형제가 덕수(德脩)
를 불공대천의 원수로 삼고 있는 바 그 복수를 지금까지 참고 미루어 온 것은 오직
노모께서 계시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노모께서 돌아가시고 안계시니 다시 더
무엇을 기다리겠는가” 하고, 경술(1610년) 8월에 도보로 나흘 만에 한성(漢城)으로
들어가 덕수(德脩)를 명례동(明禮洞) 입구에서 활을 쏘아 말에서 떨어뜨렸으나 덕수
(德脩)가 평소 이와 같은 불의의 변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갑옷을 껴입고 다녔던
까닭으로 죽음을 면하게 되니 공은 복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함을 크게 원통히
여겼다.
도성(都城)에서 나흘을 더 머무른 후 집으로 돌아왔다가 덕수(德脩)가 이번 일을
공의 형제가 저지른 소행이라고 지적해서 고발을 함으로서 의금부에 나아가 구금이
된 공은 덕수(德脩)에 관한 지난 일을 원정하고, 아울러 이번 일에 관련이 없음을
극력 변명 하였다. 그러나 당시 형조에서 덕수를 위하여 고의로 사건을 처리하지
아니하고 지연을 시킴으로서 석방이 되지못하고 있었는데 새로 형조참판이 된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이 이와 같은 사실을 듣고 분개하여 왕과 독계(獨啓)하여 사건을
처리, 왕의 재가를 얻으므로 비로서 석방을 하게 되었다.
공이 석방됨에 권석주필(權石洲畢)이 술을 가지고 공을 방문하여 위로 하였고 또한
유통제사 행(柳統制使 珩)이 어느날 남곽 박동열(南郭 朴東說)로 더불어 공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공이 자수하지 않은 바를 허물함에 박공이 꾸짖어 이르기를 “이는
네가 알바 아니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지 못하고 경솔하게 죽음의 길로 나아간다면
이 어찌 아무데서나 목을 매어 자살한 것이나 다름이 있겠느냐” 라고 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부터 덕수(德脩)가 경계를 더욱 철저히 하여 끝내 복수의 뜻을 이룰
수 없게 되니 공은 이를 평생의 한(恨)으로 여겼다.
을묘(1615년)에 관무시(觀武試)에서 장원을 하고 고산리 첨사에 제수되었다가
이듬해(1616년)에 절충장군으로 승배(陞拜)되었고 , 무오(1618년)에 내금위장에
배(拜)되었다가 곧이어 만포첨사에 제수되었었는데, 이때 마침 서쪽에서 일어난
오랑케들의 위협이 있어 공(公)은 오직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기계를 수선하는
것으로서 급무를 삼았다.
광해군 14년 임술(1622년)에 평안좌도 방어사에 제수되었고, 이듬해인 계(1623년)
에 다시 평안도 방어사가 되었었는데, 이때 인조반정이 있은 후 조정에서 북쪽의
오랑케를 방어하기 위한 계책으로 도원수인 장만(張晩)을 평양에, 부원수인 이괄(李
适)을 영변에 각각 주둔케 하였다.
그런데 갑자(1624년) 정월에 이괄(李适)이 거짓으로 남쪽에 변란이 일어났다 칭하고
공으로 하여금 군사를 인솔하고 남으로 전진하라는 전령을 보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령이 해가 저문 뒤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공은 군법에 의하여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다음날이 되어서야 군사를 정비하여 느린 행군으로 영변의 접경에 이르러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사잇길을 따라 원수부(元帥府)로 가기
위하여 숙천에 주둔하였다. 그런데 이에 앞서 구성부사 한명련(韓明璉)이 삼천여
명의 기병을 인솔하고 이괄(李适)과 합세하면서 김효신(金孝信)과 강작(康綽)으로
하여금 군사 일천여 명을 인솔하고 뒤 따라 오게 하였었는데 김효신이 한명련이
이괄로 더불어 반란을 일으킨 것을 알고 군사를 돌려 숙천으로 들어가 또한 원수부
(元帥府)로 들어갈 것을 의논하다가 졸지에 강작(康綽)에게 칼을 맞아 비록 목숨은
잃지 아니 하였으나 크게 상처를 입었다.
이에 공이 김효신의 상처가 심하여 군사를 호령할 수 없음을 염려하고 부사공을
보내어 김효신을 설득 그의 군사를 별장인 지계최(池繼凗)로 하여금 통솔케 하여
군사들의 마음을 안정시킨 후 함께 도원수가 주둔하고 있는 평양으로 나아갔었다.
공이 원수부에 도착하니 도원수 장공이 공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
내가 만일 잘못하여 장군을 죽게 하였다면 어찌 오늘의 만남이 있을 수 있으리요”
하였는데, 이는 지난날 공이 만포첨사로 있을 때 장공이 어떤 참소한 사람의 말을
믿고 하마터면 공을 살해할뻔 하였던 일을 두고 한 말이었다.
계책을 묻는 장공의 말에 공(公)이 대답하기를 “적은 사기가 왕성하여 필연코 왕경
(王京)으로 직항하였을 것이니 우리도 밤낮으로 진군하여 적들의 강력한 세력을
분산시켜야 한다” 함에 장공이 공의 계책을 찬성하고 공으로 좌선봉장을 삼았다.
공은 군사를 인솔하고 임진강에 이르렀다가 적이 이미 신교와 저탄의 관군을 연이어
격파하고 왕궁을 점거하였으며 주상(主上)께서는 남쪽으로 피난하였다는 말을 듣고
제장들과 합세하여 안현을 점거하였다.
공은 이곳에서 서쪽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이튿날 새벽에 적이 성문을 열고 도전을
개시 일지(一枝)의 적병이 냉정동으로부터 공격해오므로, 공은 이에 요충을
담당하여 독전하였고 제장들도 또한 사력을 다하여 싸움으로서 적은 마침내 크게
패배하여 수구문을 통하여 도망을 하였다. 이에 공은 정충신(鄭忠信) 유효걸(柳孝
傑)과 함께 밤을 세워 이천 묵방리까지 적을 추격하였는데 이때 이괄(李适)부하인
이수백(李守白), 기익헌(奇益獻)의 칼에 참살되었다. 인조께서 환도하여 제장들의
전공을 책록하도록 명함에 따라 공은 학성군(鶴城君)의 봉을 받고 얼마 안되어 다시
구성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인하여 부임치 못하였다.
그후 부총관을 거쳐 전라우수사에 배(拜) 되었는데 이때 관하의 변장(邊將)으로서
내척이 되는 신종술이 군기(軍器)를 가장 정밀하게 다스려, 공이 그를 위하여 포상을
신청하는 장계를 올렸다. 그런데 대관들이 공의 장계(狀啓)가 사정(私情)에 의한
것으로 의심하고 공을 탄핵하여 공은 드디어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그러나 인조께서 특별히 어사 박황(御使朴潢)을 파견하여 사실을 조사한 결과 공의
말한바와 조금도 다름이 없음에 특명으로 공을 석방케 하고 아울러 상을 더하여
내렸다.
정묘(1627년)에 오랑케가 국경을 위협함에 감사 윤훤(監司尹暄)이 공(公)으로서
별장(別將)을 삼았었는데 오랑케가 압록강을 건너옴에 공(公)으로 하여금 군사
일천여 명을 인솔하고 안주성을 방어하도록 명하였다가 공이 미쳐 안주성에
도달하기 전에 다시 공을 귀환케 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되어 안주성이 함락되니
조정에서 안주성 함락의 책임을 물어 공을 중벌로 다스리려 하였다가 당시의 실정을
파악하고 죄를 경감하여 공을 백의종군케 하였다.
적이 물러간 후 공은 부총관으로 복직하였고, 인조 9년 신미에 도독(都督) 진계성(陳
繼盛)을 살해하고, 장차 오랑케에게로 투항하려 하는 가도(椵島) 주둔장 유흥치(劉興
治)를 토벌하려는 조정의 계획에 의하여 다시 신계현령 겸 서흥산성 방어사에 제수
되었는데 얼마 후 죄를 입고 다시 파직이 되었다.
갑술(1634년)에 훈련도정에 배(拜)되었다가 곧이어 황해병사에 배(拜)되었는데
이때 지난 정묘년 안주성 함락 당시의 사건을 다시 들추어 반대한 사람들이 있어
마침내 부임하지 못하고 이듬해에 휴가를 청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있다가 병을 얻어
정침(正寢)에서 졸하니, 을해(1635년) 2월 2일이요 향년 59세였다. 부음(訃音)이
전해짐에 인조께서 치제(致祭)를 명하고 증직(贈職)을 내리었으며 동년 4월 모일에
해남현 동북쪽 선산 좌자오향(子坐午向)의 기슭에 장사 지내었다.
공은 스스로 충효의 대절(大節)로 입신(立身)하여 능히 친척간에 화목의 도리를
독실하게 실천하여 기한(飢寒)에 허덕인 사람을 가엽게 여기고 옷을 벗어주며
음식을 미루어 주기를 항상 미치지 못한것 처럼 하였다. 그러나 천성(天性)이 또한
착한 일을 좋아하고 악한 일을 미워하여 사람의 선행을 보면 자신이 행한 것처럼
기뻐하였고 악한 일을 보면 자신이 장차 오염될 것처럼 멀리 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모든 행사를 하나같이 법도에만 따라 성패나 이해로써 나아가거나
물러서지 아니 하였고, 비록 이로 인하여 아무리 액궁(阨窮)함을 당할지라도 조금도
후회하지 아니하였다. 적을 격파한 후 어느날 영해군(瀛海郡) 김기종이 방문하여
사로잡은 적병 수십 명이 군중에 유치되어있는 것을 보고 이르기를 어찌하여 죽이지
않은가라고 함에 공이 대답하기를 “비록 불행하여 적에게 빠지게 되었으나 본래는
모두가 착한 양민(良民)들인 데 어떻게 죽일 수 있으리요” 하였으니 공의 성품의
인자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그리고 훈공(勳功)을 책정할 때 마땅히 높은 서열에
들어야 할 공이 권력을 잡은 사람들에 의하여 부당하게 아래 서열로 밀려나게
되었으나, 공은 이에 대하여 조금도 자신의 공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초연하니 식자(識者)들이 대수장군(大樹將軍)의 기풍이 있다고 하였다.
공은 영암최씨 복겸(復謙)의 녀를 취(娶)하여 북병사 해성군인 여수(汝水)를 낳았고
청송심씨 언겸(彦謙)의 녀를 계실(繼室)로 맞이하여 충의위(忠義衛)인 여하(汝河)
및 여해(汝海) 여현(汝顯)과 군수 유흘연(柳屹然)에게 출가한 1녀를 낳았다. 그리고
증손 남녀 수십명 가운데 많은 사람이 무관으로 현달(顯達)하였고, 장손 세기(世器)
가 또한 남병사로서 학림군(鶴林君)의 봉(封)을 받아 한집안에 삼세(三世)가 군(君)의
책봉(冊封)을 받았으니 이와 같은 영귀(榮貴)는 옛날에도 드문 일이었다.
내가 어려서 나의 선군자(先君子) 중봉공(中峰公)을 모시고 있을 때 어떤 손님이
찾아와 나의 선군자께서 그 사람과 조용히 정담을 나눈 일이 있었는데 즉 부사공이
이때 벽동군수로서 내방을 하였던 것이다. 내가 그분의 용모를 살펴본바 병협(騈
脅:늑골이 잇닿아 붙었다는 뜻인데 이런 사람은 힘이 셈)의 체격으로서 힘이 세고
질직(質直)하며 지혜가 있어 비상한 인물로 보였었는데, 이윽고 선군자께서 좌중의
손님들에게 말하기를 “이분이 학성군의 아우이시다“ 하시면서 심히 정중하게
대접을 하신일이 있었다. 이와 같은 당시의 일이 지금도 목전의 일처럼 기억에
새롭게 떠 오르는데, 어느날 학림군의 아우인 군수 세중(世重)이 내방하여 공의
신도비명을 청하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아래와 같이 명(銘)을 지었다.
상제(上帝)에 의하여 만들어진 수많은 나무 가운데 저 예장(預章: 나무 이름)의
나무가 백길 높이 솟아 있듯 웅자(雄姿)를 하늘로부터 타고난 공 무예와 용맹이
스스로 뛰어 나네.
큰 원수가 있었음에 기필코 복수하리라 맹서하고, 호영(湖營: 호남의 병영)에서
칼을 품고 도성(都城)에서 활을 쏘았건만, 일이 마침내 성취되지 아니하니 평생을
원통하게 지냈네.
중흥(中興)을 초창하는 시기에 서사(西師: 서쪽에 주둔한 군사)가 나라를 배반하니,
공이 대의(大義)를 떨치고 군사를 돌이켜 적을 방어하였네.
안현의 전투에서 앞장서 적의 예봉을 꺾고 반역을 토벌하니, 왕이 훈공(勳功)을
가상히 여겨 봉군(封君)의 포전(褒典)을 베풀었네.
공의 평생을 살펴 보건데 오직 충(忠)과 효(孝)뿐이라 비록 다른 아름다움도 이에
우선 할 수는 없었는데, 더욱이 공의 자손마저 대대로 무신(武臣)이 되었네. 이에
공의 업적을 큰 돌에 각(刻)하여 천추의 훗날까지 길이 전하리.
숭정기원후 74년 신사년 5월 일 세움

贈吏曺判書學城君金公神道碑銘
有明朝鮮黃海道兵馬節度使鶴城君 贈兵曹判書金公神道碑銘並書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経筵事春秋館事 世子傳朴世采撰
嘉義大夫吏曹參判兼同知 経筵事 世子右賓客趙相愚書
資憲大夫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知春秋館成均館事同知 経
筵事崔錫鼎篆
竭誠奮威振武功臣嘉義大夫黃海道兵馬節度使兼黃州牧使鶴城君 贈
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金公諱完
字子具駕洛國首露王後也曾祖漢城 贈左通禮祖嗣宗 贈工曹參議考克
祧利城縣監 贈兵曹判書鶴川君妣天安全氏三世 追恩
皆因公貴焉公家世居靈巖全夫人旣娠公夢有猛虎入懷之祥乃以萬域丁
丑八月二十三日戊寅生白氣滿室經日乃散人皆異之初判書
公爲光陽倅時當李潑死於逆獄後倅韓德脩陰知與潑爲聯姻乃與前都事
鄭渫等告誣判書公有相助狀按問卒無驗德脩等遂抵反坐法
受釩其徒七人皆斃惟德脩渫減死論判書公亦蒙宥未出獄而卒公年纔十
五歲誓復其讐不以一日忘于心比服闋 國家被倭兵己數年
矣公氣度雄偉膂力過人力能扛鼎射藝超絶丁酉以勇敢隸全羅兵使李福
男麾下大爲主將所稱賞是年夏登武科戌赴慶尙防禦使高彦
伯軍期滿歸行至南原賊兵梗路乃約士人趙慶男等邀擊於弓藏峴斬首二
十餘級又擊屯院內村者斬首十餘級最後獨遌賊于獐峙下斬
首數十級血染盤石上至今遺跡存焉因名其石曰血巖明年歸從全羅兵使
李光岳住南原會德脩以都元帥權慄裨將來點兵於兵使軍公
潛懷利刀將刺殺之有爲德脩者泄其謀由是事不諧李公怒斥爲德脩者辛
丑始調小坡兒權管兼團練使掌輪 天朝所賜軍餉乃隨鄭公
光績入京師道値會射立蒭有射者二人各中三矢觀者稱快問爾國亦有能
射者乎公應曰諾遂取二人矢與射連中九矢每一中觀者亦必
連聲稱快賞賚甚盛公盡散諸一行癸卯拜武臣宜傳官甲辰除黔毛浦萬戶
丁未拜南原判官因省官罷歸遭全夫人憂泣謂弟府使公宇曰
吾兄弟義不與德脩共戴天所以濡忍至今者爲老母在耳今復何俟哉乃以
庚戌八月自靈巖徒步四日入漢京射德脩於明禮洞口應弦墜
馬猶不死盖常有戒心衷甲故也公痛之又四日還鄕旣而德脩狀斥公兄弟
乃就囚自卞當原會秋部爲德脩延獄經歲未幾仙源金公尙容
拜小秋官聞而憤之獨決以 啓始得釋權石洲鞸佩酒來慰柳統制珩與南
郭朴公東說語公事柳公咎公不自首朴公責之曰是非汝所知
父讐未復而徑就死地不幾於自經溝瀆者乎然自是德脩防患甚密公竟不
得遂志歿身以爲恨乙卯冠觀武試先除高山里僉使明年乃陞
折衝戊午拜內禁衛將旋除滿浦僉使會西鄙大聳公一以修城池繕器械爲
事天啓壬戌除平安左道防禦使癸亥改平安道防禦使冬又改
昌城防禦使時 仁祖反正有禦虜計都元帥張晩軍平壤副元帥李适軍寧
邊甲子正月适詭稱南變令公發所部兵前進檄至薄暮門閉公
却不納翌日乃整軍徐行至寧邊界聞适謀反乃從間道趨元帥府次肅川先
是龜城府使韓明璉以三千餘騎往會适使金孝信康綽領其軍
千餘人踵之孝信知明璉與适同反回兵入肅川亦議趨帥府猝被綽斫死不
殊公慮其創甚無以號令軍中遣府使公諭孝信屬兵于別將池
繼漼軍情始安仍俱詣平壤張公握手涕泣曰我若枉殺公豈能有今日耶盖
滿浦時張公用讒者言幾殺公也仍問計將安出公曰賊鋒方銳
必直向 王京吾輩惟當星夜進兵以分豕突之勢張公然之命公爲左先鋒
將到臨津聞賊己連敗薪橋猪灘兵入據京都而 上南狩公山
乃與諸將合兵據鞍峴公陣其西黎明賊開門來犯一路自冷井洞而上公兵
適當要衝督戰甚力乘勢蹙之賊始披靡諸將皆殊死戰賊遂大
北潛從水口門遁去公與鄭忠信柳孝傑等達夜追及於利川墨坊里則适己
爲帳下所斬矣 上還都命錄諸將功封公鶴城君未幾除龜城
府使病辭歷副摠管拜全羅右水使有申宗述者精治兵器爲邊將最公褒
聞之宗述故爲內戚臺官疑其私遂欬公下獄 上別遣御使朴
潢覈之一如公言 命特釋幷加賞賚丁卯西寇急監司尹暄請公爲別將及
虜到江使領兵千餘人往保安州城未至復使還兵俄而安州告
陷 朝廷將置公重律比得實狀 命以白衣從軍賊退復副摠管崇禎辛未
椵島將柳興治殺都督陳繼盛將投虜 廷議議進討除新溪縣
令兼瑞興山城防禦使未幾坐事罷甲戌拜訓鍊都正旋拜黃海兵使言者
追持前議竟不越明年請暇還鄕疳疾卒于寢室乙亥二月二日也
壽五十有九訃聞 命治祭 贈官以是年四月某甲葬于海南縣東北船山
抱午之原公旣自立於忠孝大節又能敦行睦婣軫其飢寒解衣
推食如不及然好善疾惡出於天性見人善不翅若己有之不善若將免焉
居官行事一遵繩墨不以成敗利害有所前郤雖時連阨窮而未常
自悔也破賊之後瀛海君金公起宗往訪見所禽賊數十人留置軍中曰何
爲不殺公曰彼蜼不幸陷賊本皆良民也何以殺爲其勇而能仁類
此當戡勳日公名宜在高等而用事者遂屈之然終不出矜伐語識者以爲
有大樹風焉公娶靈巖崔氏考曰復謙生子汝水北兵使襲封海城
君繼靑松沈氏父曰彦謙生子汝河忠義衛側室生子汝海女適郡守柳屹
然曾孫男女幾收十餘人多以武顯□適孫世器又爲南兵使鶴林
君三世裂土受封古所罕有者也記余小侍先君子中峰公有修刺者先君
子爲之款語從容盖府使公方以碧潼守□□來辭余觀其容貌騈
脅多力質直有智非常人也旣而先君子語座客曰此鶴城君之弟也其稱
引甚重至今如目前事乃者鶴臨庶弟郡守 世重以公 顯刻來
謁余不獲辭銘曰
惟帝賊物衆材林林 鬱彼豫章挺然百尋 公稟雄姿武勇自專 爰有大讐
誓不共天 懷劒湖營射矢都城
事竟不成痛若無生 中興草刱西師叛國 公奮大義回兵禦賊 鞍嶺之役
首撮其鋒 逆懟旣平茅土載封
觀公始終忠與孝聯 縱饒他美莫之與先 矧爾子孫世爲虎臣 肆勒大石
用垂千春 崇禎紀元後七十四年辛巳五月日 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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