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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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금석문 군서면

조봉대부 전명보 묘비

주  소
군서면 월곡리 312-2
건립연대
정사 2월(1917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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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유허비 증 조봉대부 동몽교관 천안전씨 전명보의 묘

영인(令人) 전의이씨, 왼쪽 합장(祔左) 묘좌(卯坐,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여 앉은 자리)
효자 오재(梧齋) 전씨 유사(遺事)
공은 전씨(全氏)로 휘는 명보(命普), 자는 경관(景寬), 관향은 천안이다. 백제(百濟) 공신
환성군(歡城君) 의(義)가 시조가 되니, 신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이름난
고관대작들을 배출하였다. 후손 문식(文軾)의 대에 이르러 처음 우리 조정에 들어왔으니,
그 관직은 형조참판(刑曹叅判)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휘 천근(天近)을
낳았으니, 천근은 관직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천근이 사건(思乾)을 낳았으니, 사건의
관직은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다. 5대를 내려와 승문(承文)이 처음 호남 영암에
기거하였다. 또 3대를 내려와 휘 몽태(夢台)는 선전관(宣傳官)을 지냈으며, 인조 갑자년에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으니 바로 공의 6대조가 된다.
증조부는 성수(聖壽), 조부는 이귀(爾龜)이다. 부친은 석조(錫祚)이고, 그 부인은 창녕조씨
한정(漢挺)의 따님이다. 공은 영조 병진년에 태어났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린 시절부터 항상 어버이의 곁에 있으면서 나가되 멀리 가서 놀지 않았고, 나갈 때에는
반드시 목적지를 아뢰었고, 어버이의 명에 응대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행동이나
부모님의 잠자리를 편히 하는 것을 한결같이 어버이의 뜻을 따르는데 힘썼다. 모친상을
당하자 슬픔으로 인하여 의례에서 정한 제도를 훼손하였고, 계모인 이씨를 모실 때에는
더욱 성실히 하였는데, 계모 이씨는 소생이 없었다. 부친은 성정이 엄격하고, 은정이 적어
이씨에게 박하게 대하여 다른 거처에 내보내고, 물과 먹을 것을 끊었다. 공이 이씨에게
가서 슬퍼하며, 그 생활을 돌보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이바지하였는데, 함께 모시고 살
때처럼 하였다.
어쩌다 부친이 노하여 들이닥치면 자유로이 할 수 없어서,
곧 섬돌 앞의 오동나무로 가서 몰래 먹을 것을 가져와
봉양하였다. 이같이 3년을 지내자, 부친이 이내 감동하여
깨닫고 부부의 사이가 처음과 같이 되었다. 이씨가 세상을
뜨자 뜨락을 출입할 때마다 문득 오동나무를 어루만지며
울었는데, 그 방에 오재(梧齋)라고 편액을 달았으니, 아마
모친의 일을 의탁한 것인 듯하다.
정조[正宗] 임자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57세였으며,
묘는 호동(虎洞)의 묘좌에 있다. 지금 조정에서 도계(道啓)
로 인하여 특별히 그에게 동몽교관을 증직하였다. 부인은
전의(全義) 이씨 이만신(李萬臣)의 따님이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이름이 광택(光澤), 광신(光臣), 광두(光斗),
광직(光稷)이다. 딸 둘을 두었으니, 각각 송진옥(宋振玉),
박동원(朴東垣)에게 시집갔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인성(人性)은 본래 선하여 모두 효도를 할 수 있지만,
세교(世敎)가 잘못되어 인심(人心)이 잘못된 곳으로
빠져들어 정말이지 친혈육인 처지가 아니면 모두 마지
못 해 하는 외양이 되었고, 참된 성심에서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나오는 경우는 매우 적다. 공은 충효
(忠孝)를 가풍으로 하는 가문에서 낳고 자라 공손하게
자식의 직분을 닦았으니 본래 당연히 이렇게 한 것이지만,
계모에게 성심을 다하여 끝내 엄정한 부친이 공의 정성에
감동하여 마음을 돌릴 수 있게 하였던 것은 또한 일반적인
사람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만약 주자[晦翁夫子]가 다시 나오는 일이 있더라도 계모를
잘 모신 민손(閔損), 왕상(王祥)과 병칭되어 오래 전하지
않을지 어찌 장담하겠는가?
공의 현손인 홍균(洪均)이 공의 실기를 가지고 와서 내게
문서를 써달라고 청하므로 좋은 문장이 아님을 이유로
사양하기가 의리상 어려워 끝내 그 실기를 근거하여
이상과 같이 기록하여 입언(立言)하는 군자가 가려 줄 것을
대비한다.
해는 무술년 2월 월성 최익현 씀
정사 2월 일
현손(玄孫) 행균, 5대손 종국

孝子遺墟碑 贈朝奉大夫童蒙敎官天安全公命普之墓
令人全義李氏 祔左 卯坐
孝子梧齋全公遺事 公姓全氏諱命普字景寬天安人以百濟功臣歡城君義
爲始祖歷訢
羅至高麗代有顯仕傳至諱文軾始八我 朝官刑曹叅判諡文平生諱天近官大
司憲生諱思
乾官工曹判書五傳至諱承文始居湖南之靈巖又三傳至諱夢台宣傳官 仁祖
甲子錄振武
原從勳於公六世曾祖聖壽祖爾龜考錫祚妣昌寧曺氏漢挺女公以 英祖丙辰
生天性至孝
自齠齔常在親側出不遠遊遊必有方應對進退晨昏省定一以承順親意爲務
及遇母喪哀毁
守制事繼母李氏甚謹無間所生父性嚴少恩薄於李氏使廢置別處絶不飮食
公徃哀服勵供
饋水菽一如同室時間或迫於父怒有不得自由則摘階前桐業密齎養給以供
之如是者凡三
年父乃感悟遂爲夫婦如初及李氏死出入庭除 輒撫桐涕泣扁其室曰梧齋盖
寓戀母之差也
正宗壬子卒享年五十七墓在虎洞卯坐今 正朝因道啓特 贈童蒙敎官配全
義李氏萬臣
女子男四光澤光臣光斗光稷女二宋振玉朴東垣孫曾以下不盡記噫人性本
善皆可爲孝而
但世敎廢弛人心陷溺苟非血肉傳禪之地則類皆黽勉外樣而愛慕出於眞誠
者盖鮮矣公生
長忠孝之門恭修子職固當如是而至其盡誠於異顔之母終能感回其嚴父之
心則又非夫人
昕可及也百世之後復有如晦翁夫子出則安知不以善事繼母之閔損王祥幷
稱而傳之夂遠
也與公玄孫洪均袖公實記請余爲状義難以不文辭遂攄而筹録如右備立言
君子擇焉歲戊
戌仲春月城崔益鉉書
歲丁巳二月 日
玄孫行均 五代孫鐘國

효자유허비 증조봉대부동몽교관천안전공
명보지묘
영인전의이씨 부좌 묘좌
효자오재전공유사 공성전씨휘명보자경관천안인이백제공신환성군의
위시조역흔
나지고려대유현사전지휘문식시팔아 조관형조참판시문평생휘천근관대
사헌생휘사
건관공조판서오전지휘승문시거호남지영암우삼전지휘몽태선전관인조
갑자록진무
원종훈어공육세증조성수조이구고석조비창녕조씨한정녀공이영조병진
생천성지효
자초츤상재친측출불원유유필유방응대진퇴신혼성정일이승순친의위무
급우모상애훼
수제사계모이씨심근무간소생부성엄소은박어이씨사폐치별처절불음식
공왕애복려공
궤수숙일여동실시간혹박어부노유부득자유칙적계전동업밀재양급이공
지여시자범삼
년부내감오수위부부여초급이씨사출입정제첩무동체읍편기실왈오재개
우련모지차야
정종임자졸향년오십칠묘재호동묘좌금정조인도계특증동몽교관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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