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본문 바로가기





영암의 금석문 서호면

좌찬성 박세모 묘갈명

주  소
서호면 엄길리 1130-14
건립연대
숭정기원후 71년 무인 12월(1698년) *박세모 : 1610~1667

본문

 

1711417577.2436NCilZPXnQq.png

1711417579.7997eCiKQtSafY2.png

1711417582.5373HHYzMcbBFg3.png



증 좌찬성 박공 묘갈명(전액)

유명조선국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세자이사 지경연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행 가의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박공 묘갈명 병서
자헌대부 의정부 우참찬 겸 지경연사 홍문관 제학 박세당 지음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령 의정겸영 경연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류상운 씀
통정대부 수충청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 절도사 순찰사 홍수주 전서
공의 휘는 세모(世模)이고, 자는 여도(汝道)이며, 성은 박씨이다. 시조는 신라에서
유래하였는데, 그 세계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 수 없다. 1300여 년이 지나 호장공
응주(應珠)가 지금 나주의 옛 반남현에 살다가 그 땅에 묻힌 뒤, 자손들이 드디어
반남을 본관으로 삼았다. 4세를 내려와 수(秀)는 고려 공민왕 때에 관직이
밀직부사로서 정계에 진출하였고, 그의 아들인 우문관직제학 상충(尙衷)은 충간을
하다가 우왕에게 화를 입었는데, 본조에 와서 문정으로 추시되었다. 그의 아들
평도공 은(壻)은 태종을 도와서 좌명공신이 되니, 가문이 더욱 번성하였다. 그
후 5세를 지나 사간 소(紹)가 중종 때 유명하였는데, 이 분이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 대사헌 응복(應福)은 매우 정성스럽고 신의가 있어 명종과 선조 때 이름이
드러났다. 조부 황해도 관찰사 동열(東說)은 덕과 문장이 뛰어나 세상에서 남곽(南
郭)이라 하여 숭상하였으나, 당대에는 곤란을 겪었다.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선고
호(濠)는 너그럽고 중후하였으며, 선비 평산신씨(平山申氏)는 문정공(文貞公) 흠
(欽)의 따님이다. 공은 광해군 2년(1610) 9월 4일에 서울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이미 자질이 뛰어났다. 9세 때에 모친상을 당하여 외조부가 양육하였다.
외조부는 공의 기량을 높게 평가하였으니, 여러 손자들 중에 비할 만한 이가
없었다. 인조 8년 경오년(1630)에 진사에 선발되었다. 을유년(1645)에 세마(洗馬)
로 등용되었으나 관직을 사퇴하고 돌아와 아버지를 모셨다. 정해년(1647)에 다시
세마에 서용되고, 시직(侍直)과 부솔(副率)로 옮겼다가 파직되었다. 효종 3년(1652)
에 다시 내시교관으로 임용되었고, 5년인 갑오년(1654) 3월에 효종이 춘당대에
친림하여 문과시를 치렀는데, 공이 1등으로 급제하였다. 왕은 공의 글을 보고 매우
즐거워하였고, 특히 “오직 소인만이 무사함을 즐기기 때문에 대성인께서는 편안할
때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다.”란 대목을 읽으면서 더욱 칭찬하여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보았다. 예전에 조부 남곽(南郭) 선생이 선조 27년 갑오년
(1594)의 정시(庭試)에서 1등으로 급제하였다. 그런데 60년이 지난 갑오년(1654)에
공이 다시 조부의 경사를 이으니, 사람들이 그 일을 기이하게 여겼고 또 그 영광을
부러워하였다. 전적에 임명되었다가 병조좌랑으로 옮겼고, 또 정언과 직강을 거쳐서
춘방(春坊)으로 들어가 사서가 되었다. 을미년(1655)에 병조정랑으로 전임되었다가
다시 문학과 지평을 거쳤는데, 모두 3번 임명되고 3번 교체되었다. 외직으로 나가
해운판관이 되었다. 병신년(1656)에 또 내직으로 들어와 문학이 되었다. 여러 번
지평ㆍ정언ㆍ병조정랑ㆍ사예ㆍ필선 등을 지냈다. 얼마 안 되어 다시 외직으로 나가
부평부사가 되었는데, 너그럽고 대범하며 대체를 견지하였다. 자잘하게 따지는 일로
명예를 구하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또 근면하고 삼가며 절검을 숭상하니, 백성들이
모두 편안해하였다. 이에 앞서 부평 백성 중에 상사(上司)의 압력으로 노비를 빼앗긴
자가 있었는데, 관리들이 꺼리고 두려워하여 그 일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공이 부임하자 그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했으면서도 스스로 신원하지 못한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자 공이 사실을 살펴 노비를 풀어주어 주인에게 돌려보내도록
결단을 내렸다.
상사(上司)가 과연 화를 내며 공의 죄를 캐물었으나, 공은 힘써 분변하여 결코
굽히지 않았다. 정유년(1657)에 겨울에 계모 윤부인(尹夫人)의 상을 당하였다.
현종 원년 경자년(1660)에 상복을 입는 기간이 끝나자 정언이 되었다가 사간이
되었다. 효종이 붕어하였을 때 어머니인 장렬왕후가 상복을 입는 문제에 대해 1
년복으로 결정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3년복을 주장하였다. 이에 그 틈을 타고
함정에 빠뜨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론(異論)이 마구 일어났는데, 마침 봉서(封
書)를 올린 자가 있었다. 공은 장관 이경억(李慶億) 공과 함께 그 간계를 분명하게
논척하다가 체직되어 사성(司成)에 제수되었다. 집의에 배수되고 체직되어
장악원정에 제수되었다. 그해 12월에 다시 집의가 되었다가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신축년(1661) 3월에는 첨지중추가 되었다. 4월에는 우승지로 임명되었다. 7월에는
좌승지로 옮겨 내의원부제조를 겸임하였다. 8월에 왕세자가 태어나니, 경사에
수고하였다는 명목으로 승진하여 행도승지에 임명되었다. 임인년(1662) 3월에
체직되어 한성우윤이 되었다가 부총관과 동지의금부를 겸임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경기도관찰사가 되어서는 속주(屬州)의 관리 가운데 직무를 경건히 수행하지 않는
자를 축출하였다. 그 관리는 상당히 신분이 높은 집안사람이라서 교유하는 사람들이
중간에서 풀어 주기를 요구하는 일이 많았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계묘년(1663)
5월에 호조참판이 되었다. 당시 호조판서로 있던 정치화(鄭致和)가 공의 일처리가
주도면밀함을 보고 탄복하며 말하였다. “공이 이처럼 직무를 잘 수행할 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공이 웃으며 대답하였다. “일처리를 하는 것은 관리들이고, 저는 오직
힘을 실어 주었을 뿐입니다.” 정공은 그의 겸손함을 더욱 칭찬하였다. 갑진년(1664)
에 형조참판이 되었다. 가을에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을사년(1665) 4월에는 왕을
모시고 온천에 다녀온 공로를 인정받아 도성으로 돌아와서 동지돈녕에 임명되었다.
또한 경사스런 일에 수고하였다는 명목으로 가의대부로 승진하였다. 병오년(1666)
정월에는 형조참판이, 2월에는 예조참판이 되었다. 봉양하기 위해서 외직을 바라
개성유수가 되었으나, 미처 부임하기 전에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정미년(1667)
4월에는 또 다시 왕의 온천 행차를 모시고 갔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그해 11월에
부인 안씨가 죽고, 이어서 아버지 첨추공이 별세하셨다. 공은 슬픔이 지나쳐 상례를
거의 주관하지 못하였고, 병에 걸린 지 며칠 만에 돌아가셨다. 이 날은 12월 26
일이었으며, 향년은 58세였다. 조정의 예관이 와서 부의를 전하였고, 왕은 공의
부자가 10여일 사이로 연이어 작고하였음을 애통해하며,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상여꾼[人夫]과 쌀ㆍ베 등을 보냈다. 무신년(1668) 5월 24일에 양주(楊州) 풍두산
(風頭山) 선영의 동남쪽 건좌(乾坐)의 언덕에 부인 안씨와 합장하였다. 공은 키가
크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풍채가 훤칠하였다. 기백이 웅건하고 진솔하며 화통하여
소심하게 굴지 않았다. 남들과 교유할 때는 격의 없이 속내를 다 터놓았지만 잘못을
질책할 때에는 가차 없었다. 또한 자신의 몸가짐은 검소하였고, 공무를 처리할
때는 신중하고 부지런하였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재덕이
선대에 만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는데, 지금 이와 같은 지우를 입었으니, 어찌
요행이 아닌가? 오직 근결(勤潔)로써 힘써 노력하여야 우리 조상을 욕되지 않게
하고, 또한 이것으로 보답하는 방도를 삼아야 할 것이다.” 매번 일이 많고 중요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급한 일 때문에 말미를 청한 적이 하루도 없었으며, 피로하고
고생스러운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집안에서는 재산을 축적하지 않아 남에게 빌려
먹고 살았으며, 타고 다니는 안장도 낡아 도저히 탈 수 없을 정도였다. 서필원(徐必
遠)이 해서 지방을 다스리러 갔다가 새 안장을 사왔다. 그리고 공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놀려댔다. “안장을 고치는 자가 ‘우리 재상의 검소함이 이러하므로
태평한 세상을 기대할 수 있다.’고 치하하였소. 공의 안장은 치란(治亂)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인가 보오.”
왕실과 혼인을 하게 된 뒤로는 더욱 스스로 삼가서 의장(儀章)과 물채(物采)를 모두
절약하고 줄여 사치함이 없었다. 또한 선을 즐기고 의리를 좋아함은 지성에서 나왔다.
사랑과 공경을 다해 부모를 섬겼는데, 계절마다 축수를 올려 기쁘게 해드렸다. 제사에는
청결하게 하여 자신이 몸소 참여하였으며, 종족을 거두어 보살피고 친구들에게까지도
그렇게 하였다. 서로 교제한 벗으로 재상 홍명하ㆍ판서 박장원ㆍ판서 이경징(李慶徵)
형제ㆍ서필원(徐必遠)ㆍ이상진(李尙眞) 같은 이는 모두 당시에 덕망이 높은 인물들이었다.
집의 윤선거(尹宣擧)는 공과 우의가 매우 독실하였으며, 판서 송준길(宋浚吉)은 공을
재상의 풍도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부인 순흥안씨(順興安氏)는 우의정 현(玹)의 5대손인
찰방 두원(斗元)의 따님으로, 무신년(1608) 7월 13일에 태어났다. 온순하고 부도(婦道)
를 갖추어 시부모를 섬김에 어긋남이 없었고, 근면하고 검소하게 집안을 다스려 생계를 잘
꾸려나갔다. 2남을 두었는데 태장(泰長)은 군수이고, 태중(泰中)은 일찍 죽었다. 1녀는
군수 이세필(李世弼)에게 시집갔다. 측실에 2녀가 있는데, 최진음(崔鎭暑)ㆍ김하평(金夏平)
에게 시집갔다. 태장의 2남 중 장남 필성(弼成)은 효종의 따님인 숙녕옹주(淑寧翁主)에게
장가들어 금평위(錦平尉)가 되었고, 차남은 필진(弼震)이다. 측실에서 난 아들은 필신(弼臣)
이다. 태중(泰中)의 두 아들은 필문(弼文)ㆍ필무(弼武)이다. 이세필(李世弼)의 아내는 4남을
두었는데, 태좌(台佐)는 진사(進士)이고, 다음은 정좌(鼎佐)ㆍ형좌(衡佐)이고, 막내아들은 아직
어리다. 그리고 1녀는 박항한(朴恒漢)에게 시집갔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야천과 남곽은 나의 고조와 조부이시고, 문정공 신흠(申欽)께 나는 외손자가 된다네.
내 묘갈을 지은 자를 나는 아우라 부르고, 내 묘갈을 지은 자는 나를 형이라 부르네.
내가 정시(庭試)에서 장원을 하니 3대에 걸쳐 명성이 드러났네.
나는 예조참판을 역임하였고, 또한 도승지도 지냈지.
못된 자와 상대 않고 선한 자와 더불며, 태평한 시절에 태어나 태평한 시대에 죽었네.
나보다 뒤에 죽고 나보다 뒤에 태어난 자 가운데 나를 따르려는 자 누구일까?
숭정기원후 71년 무인년 월 일 세움

贈左贊成朴公墓碣銘
有明朝鮮國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 世子貳師知 経筵
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
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行嘉義大夫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
都摠府副摠管朴公墓碣銘 並書
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兼知経筵事弘文館提學朴世堂 撰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経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
象監事 世子師柳尙運 書
通政大夫守忠淸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洪受疇 篆
公諱世模字汝道姓朴氏其先出自新羅亦莫能詳其世歷千三百餘年而戶
長應珠居今羅州之潘南故縣因葬其地子孫遂籍
潘南四世至秀當高麗恭愍王時官密直副使始顯于朝生右文館直提學尙
衷以忠諫蒙禍于主禑之世 本朝追諡文正文正
生平度公壻相我 太宗策功佐命族益大後五世至司諫諱紹有名 中宗
時是爲公高祖曾大父大司憲諱應福忠信篤厚顯
明宣際大父黃海道觀察使 贈吏曹參判諱東說德量文章重一世世稱南
郭竟跌於時父僉知中樞府事 諱吏曹判書諱濠
寬仁厚重母平山申氏文貞公欽之女公以光海君二年庚戌九月四日生于
京都幼卽岐萄九歲遭申夫人憂鞠于文貞文貞深
器異之諸孫莫如也 仁祖八年庚午選進士乙酉除洗馬解官歸侍丁亥復
敍洗馬轉侍直副率罷 孝宗三年壬辰復除內侍
敎官五年甲午三月 孝宗親臨試士春塘臺公擢居第一 上見公文甚喜
讀至惟小人樂其無事故大聖安不忘危尤稱賞左
右咸聳初南郭以 宣祖二十七年甲午 庭試第一甲子一周而公復嗣美
談者異其事而慕其榮授典籍改兵曹佐郞拜正言
膨授直講入春坊爲司書乙未轉兵曹正郞改文學改持平凡三拜三膨出爲
海運判官丙申又入爲文學屢拜持平正言兵曹正
郞轉司藝改弼善未幾復出爲富平府使寬簡持大體惡苛細近名又勤謹儉
節民皆安之先是富平民有奴婢爲上司所抑奪吏
憚畏不肯爲之直及公之至民自訴受屈而不獲伸公察其情斷奴婢還之主
上司果怒勘公公力辨不爲撓丁酉冬遭繼母尹夫
人憂 顯宗元年庚子制除拜正言改司諫 孝宗之喪 莊烈王后當制服議
者定以期或謂宜服衰三年於是異論橫起投抵
間隙意在傾陷會有上封者公與長官李公慶億明斥其奸膨授司成拜執義
膨授掌樂正是年十二月復由執義擢拜同副承旨
辛丑三月膨授僉知中樞四月拜右承旨七月轉左兼內醫副提調八月 王
世子生用慶勞陞秩拜行都承旨壬寅三月膨拜漢
城右尹兼副摠管同知義禁府出爲京畿觀察使黜屬州之吏不虔其職者吏
族盛貴游多居間求解終不聽癸卯五月入爲戶曹
參判鄭相國致和爲判書見公裁處審詳歎服曰不意公長於吏事如此公笑
曰此乃郞吏爲之吾惟假之重而已鄭公益多其能
讓甲辰拜刑曹參判秋再爲都承旨乙巳四月扈 駕溫泉及還膨授同知敦
寧又以慶勞陞秩嘉義丙午正月拜刑曹參判二月
移拜禮曹參判爲養求外拜開城留守未赴而改復拜禮曹參判丁未四月復
扈 駕溫泉還十一月夫人安氏卒繼而僉樞公捐
館公毁甚幾不能喪感疾數日竟不起是年十二月二十六日年五十有八禮
官致賻 上愍公父子旬月繼沒 特加恩賜落夫
及米布戊申五月二十四日與安夫人合葬于楊州之鳳頭山先塋東南坐乾
之原公長身美髥風神聳爽氣度俊偉任眞率性襟
懷豁然不肯碌碌其與人也傾倒無間及鐫責其失亦未嘗輒饒也持身簡儉
奉公勤恪常曰吾未有才德及先世萬一今乃遭遇
至此寧非幸乎惟當以勤潔自勉庶不辱吾祖且以爲報效圖每居劇地未嘗
一日請急雖勞悴不恤家不蓄産假貸以食所御鞍
候甚不任乘徐公必遠之出鎭海西取鞍改之還書襤公曰主治鞍者賀我宰
相能安於儉如此太平殆可冀豈公之鞍輒關治亂
耶及至託婚天家益自畏愼凡儀章物采一皆節損擧無侈觀焉樂善好義出
於至誠事兩尊人愛敬備至每時節上壽極其歡適
祭祀虔潔身自臨贇收恤宗族以及知舊所與交若洪相國命夏朴判書長遠
李判書慶徽昆弟徐判書必遠李相國尙眞皆一時
名德尹執義宣擧與公情好甚篤宋判書浚吉稱公有宰相風度安夫人系出
順興右議政玹五代孫察訪斗元女以戊申七月十
三日生婉順得婦道事尊章無違治家勤儉善於爲生生二男泰長禮賓寺正
泰中早沒一女適郡守李世弼側出二女適崔鎭暑
金夏平泰長二子長弼成尙淑寧翁主封錦平尉公之 贈官錦平貴得推
息故次弼震側出一男弼臣泰中二子弼文弼武李
世弼妻四子三女台佐進士次鼎佐衡佐景佐女適朴恒漢權燮元命龜銘曰
冶川南郭吾大父高祖惟申文貞吾其外孫 識我藏者我謂吾弟銘我隧者
謂我其昆 我擢庭甲三世華聞我貳春官亦長納
言 不善不與善吾與生太平死太平年 後我而死後我生企踵我者何人
崇禎紀元後七十一年戊寅 月 日立

증좌찬성박공묘갈명
유명조선국 증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 판의금부사 세자이사지 경연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성
균관사오위도총부도총관행가의대부예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
도총부부총관박공묘갈명 병서
자헌대부의정부우참찬겸지경연사홍문관제학박세당 찬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령의정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
상감사 세자사류상운 서
통정대부수충청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홍수주 전
공휘세모자여도성박씨기선출자신나역막능상기세력천삼백여년이호장응주거
금나주지반남고현인장기지자손수적반남사세지수당고려공민왕시관밀직부
사시현우조생우문관직제학상충이충간몽화우주우지세 본조추시문정문정
생평도공서상아 태종책공좌명족익대후오세지사간휘소유명 중종시시위공
고조증대부대사헌휘응복충신독후현명선제대부황해도관찰사 증이조참판
휘동열덕량문장중일세세칭남곽경질어시부첨지중추부사 휘이조판서휘호
관인후중모평산신씨문정공흠지녀공이광해군이년경술구월사일생우경도유즉
기도구세조신부인우국우문정문정심기이지제손막여야 인조팔년경오선진
사을유제세마해관귀시정해복서세마전시직부솔파 효종삼년임진복제내시
교관오년갑오삼월 효종친임시사춘당대공탁거제일 상견공문심희독지유소
인락기무사고대성안불망위우칭상좌우함용초남곽이 선조이십칠년갑오
정시제일갑자일주이공복사미담자이기사이모기영수전적개병조좌낭배정언
팽수직강입춘방위사서을미전병조정낭개문학개지평범삼배삼팽출위해운판관
병신우입위문학누배지평정언병조정낭전사예개필선미기복출위부평부사관
간지대체악가세근명우근근검절민개안지선시부평민유노비위상사소억탈이
탄외불긍위지직급공지지민자소수굴이불획신공찰기정단노비환지주상사과노
감공공력변불위요정유동조계모윤부인우 현종원년경자제제배정언개사간
효종지상 장렬왕후당제복의자정이기혹위의복쇠삼년어시이론횡기투저
간극의재경함회유상봉자공여장관이공경억명척기간팽수사성배집의팽수장락
정시년십이월복유집의탁배동부승지신축삼월팽수첨지중추사월배우승지칠
월전좌겸내의부제조팔월 왕세자생용경노승질배행도승지임인삼월팽배한
성우윤겸부총관동지의금부출위경기관찰사출속주지이불건기직자이족성귀유
다거간구해종불청계묘오월입위호조참판정상국치화위판서견공재처심상탄
복왈불의공장어이사여차공소왈차내낭이위지오유가지중이이정공익다기능
양갑진배형조참판추재위도승지을사사월호 가온천급환팽수동지돈녕우이경
노승질가의병오정월배형조참판이월이배례조참판위양구외배개성유수미부
이개복배예조참판정미사월복호 가온천환십일월부인안씨졸계이첨추공연
관공훼심기불능상감질수일경불기시년십이월이십육일년오십유팔례관치부
상민공부자순월계몰 특가은사락부급미포무신오월이십사일여안부인합장
우양주지봉두산선영동남좌건지원공장신미염풍신용상기도준위임진솔성금
회활연불긍록록기여인야경도무간급전책기실역미상첩요야지신간검봉공근각
상왈오미유재덕급선세만일금내조우지차녕비행호유당이근결자면서불욕오
조차이위보효도매거극지미상일일청급수로췌불휼가불축산가대이식소어안
후심불임승서공필원지출진해서취안개지환서람공왈주치안자하아재상능안어
검여차태평태가기개공지안첩관치란야급지탁혼천가익자외신범의장물채일
개절손거무치관언락선호의출어지성사양존인애경비지매시절상수극기환적
제사건결신자임윤수휼종족이급지구소여교약홍상국명하박판서장원이판서경
휘곤제서판서필원이상국상진개일시명덕윤집의선거여공정호심독송판서준
길칭공유재상풍도안부인계출순흥우의정현오대손찰방두원녀이무신칠월십
삼일생완순득부도사존장무위치가근검선어위생생이남태장례빈사정태중조몰
일녀적군수이세필측출이녀적최진서김하평태장이자장필성상숙녕옹주봉금
평위공지 증관금평귀득추 식고차필진측출일남필신태중이자필문필무이
세필처사자삼녀태좌진사차정좌형좌경좌녀적박항한권섭원명구명왈
야천남곽오대부고조유신문정오기외손식아장자아위오제명아수자위아기곤
아탁정갑삼세화문아이춘관역장납언 불선불여선오여생태평사태평년
후아이사후아생기종아자하인
숭정기원후칠십일년무인 월 일립





방문자 집계

오늘
1,585
어제
2,734
최대
3,242
전체
1,300,386

영암문화원 열람실 | 대표자 : 원장 김한남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교동로55

TEL : 061-473-2632 | FAX : 061-473-2732 | E-mail : [email protected]

Copyright © 영암문화원. All rights reserved.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