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본문 바로가기





영암의 금석문 서호면

이조참판 박동열 신도비

주  소
서호면 엄길리 130-14
건립연대
슝정기원후 67년 갑술 12월(1694년) *박동열 : 1564~1622

본문

 

1711415470.1435XYhqshpNXI.png

1711415473.2902jYwDyHyjsU2.png



증 이조참판 행 황해도관찰사 박공 신도비명(전액)

유명조선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 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
관제학예문관제학 세자좌부빈객 행 통정대부 수황해도관찰사 겸 병마사
군절도사 박공 신도비명 병서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영 경연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
사 세자사 신흠 지음
족증손 통훈대부 행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 태유 씀
보국숭록대부 영돈녕 부사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민유중 전서 씀
흠(欽)이 상투를 올리고서 장안에 유학할 때 함께 사귄 이들은
다 당시의 명류이거나 혹은 행실로 혹은 재주로 혹은 문장으로
벼슬길에 올라서 두각을 드러낸 명사대부들이 되었다.
그러나 큰 사업을 이룰 국량(局量)과 천성적으로 얻은 덕을 지녀,
맑게 해도 더 이상 맑아지지 않고 휘저어도 흐려지지 않으며,
겉치레를 자랑하는 자가 만났을 때 그 장기가 무색해지고
기예를 담론하는 자가 만났을때 그 자랑함이 무색해지는
그러한 경우를 논한다면 모두 박공 열에게 사양해야 한다.
열지의 이름은 동열이고 호는 남곽이다.
그 조상은 신라에서 나왔으니 신라 왕의 자손인데
나주에 흩어져 사는 이들은 반남박씨이다.
고려 말에 우문관직제학 상충은 곧은 절개로 세상에 드러났고,
본조에 들어와 좌의정 금천부원군 은(壻)은 공업으로 이름이 났는데
공의 8대조이다. 증조부 조년은 이조정랑에서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조부 소(紹)는 사간원 사간에서 영의정에 추증되었는데,
일찍이 김안로는 간사하므로 다시 서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가
조정에서 밀려나 영남에 은거하던 중 별세하였으며 호는 야천이다.
선고 응복은 대사헌을 지냈으며 반천부원군에 추증되었고,
선비 임씨는 선산의 명문으로 별좌 구령의 따님이다.
가정 갑자년(1564)에 공을 낳았는데, 어린아이 때 벌써 남달리 준수하여
다섯 살에 글을 읽을 줄 알았다. 겉은 질박하고 둔한 것처럼 보였으나 속은
총명하여 민첩하게 암기하였으므로 함께 공부하는 자들이 따라잡지 못했다.
제부 반성군과 남일 두 공이 매우 공을 중하게 여겨 원대한 장래를
기대하면서 오직 일찍 명성을 얻을까 염려하였다.
차츰 자라면서 글을 짓고 학업을 닦아 문장이 날로 진보하였다.
신사년(1581)에 한성시에 합격하고, 을유년(1585)에 사마시에 합격한 뒤에
태학에 들어가자 제생이 온통 우러르고 사모하여
난새나 봉황을 바라보듯 하는 정도만이 아니었다.
기축년(1589)에 역적 정여립이 사대부 사이에서 나오니,
관련된 자들이 많아 조정의 논의가 날로 격해졌다.
심지어 성균관 유생들도 소장을 올려 관련자의 처벌을 주장하자
사람들이 다 두려워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공이 급히 상소하니
서로들 경하하기를 “이제 걱정이 없겠다.”라고 하였는데, 공이 과연 그
사이에 잘 조정하여 별문제가 없게 되었다.
갑오년(1594)에 정시에 장원 급제하고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에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어느 한 구상이 귀양을 가 있었는데
그를 다시 서용하기 위해 그의 족형이 사간원의 수장으로 있으면서
장차 송강 정철의 죄를 추론하여 당대의 사류를 몰아내고
구상의 입지를 좋게 만들어주려 하였다. 이에 공은 그것이 무고임을 전달하여
시배들과 서로 어긋나 병조 좌랑으로 체직되고, 해주 분사에서 중전을 호종하다가
을미년(1595)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병신년(1596)에 예조 정랑에 제수되고,
접반사의 종사관으로 밖에서 돌아오자마자 또 어사가 되어 북도를 순찰하였다.
정유년(1597) 에는 병조에서 지방으로 나가 영변판관이 되는 등
수년 동안 하루도 조정에 편히 있지 못하였으니, 이는 소인의 음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때 중국의 군대가 재차 출병하였는데, 백성을 갈라서 군량을 수송하고
사람 수를 헤아려 번갈아 쉬도록 함으로써 민력이 쇠진하지 않고 촌락이 평온하였다.
무술년(1598)에 부친상을 당하고, 경자년(1600)에 상기를 마치고서
시강원사서가 되었으며, 신축년(1601)에 홍문관의 수찬ㆍ교리가 되고, 문학ㆍ지평을
역임한 뒤에 이조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가을에 원접사의 종사관으로 의주에 갔다가 모친의 병환으로 인해 체직되었다.
임인년(1602)에 검상ㆍ사인이 되고 사성ㆍ상례ㆍ통례로 전임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통정에 가자되고 황주목사에 제수되었다. 황주는 의주로 통하는 대로에 위치하여
험한 요해처로 이름이 난데다 대대적으로 부역을 치르는 때를 만났으나, 재력의
대소를 비교하고 거리의 원근을 헤아려 일정한 한계를 세우고 서로간에 조화롭게
하여 하나같이 균등하게 하였으므로, 민가는 병들지 않고 관가의 용도는 항상
넉넉하였다. 힘써 먼 장래의 일을 위하고 법령이 지나치게 세밀하지 않았으므로
온갖 일이 다 성사되어 정사가 맑고 송사가 사라지니, 노인들이 하는 말이 “백년
이래로 이처럼 훌륭한 수령은 없었다.”라고 하였다. 어사가 특별한 치적이 있다는
것으로 계문하자 임금은 옷감을 주어 표창하였다. 임기가 차 조정으로 들어와
예조참의와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고 서열에 따라 우부승지로 승진하였다.
대마도의 왜노가 가강(家康)의 설로써 화친을 요구하고 두 병졸을 보내어 말하기를
“이들은 임진년에 능을 범했던 적도들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권세 있는 재상이 나라의
일을 마음대로 하면서 그 일을 자신의 공으로 삼기 위해 장차 종묘에 고하고 포로를
바치는 의식을 행하려 하자, 공은 상소하여 말하기를 “교활한 적들은 거짓이
많습니다. 만일 서울까지 잡아 왔다가 그것이 사실이 아닐 경우에는 적에게 기만을
당한 것이 되어 후세에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그들을 국경에서 목을 베어 정면으로
그 간교함을 꺾으소서.”라고 하였다. 선조가 여러 재상들에게 함께 의논할 것을
명하였는데 오직 오성 이공의 헌의만이 공과 합치하였다. 결국 형틀에 묶어 잡아와
국문하여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이 밝혀지자 사람들은 비로소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가뭄이 들어 구언할 때 공이 어떤 이를 대신하여 상소하면서 나라의
위태롭고 어지러운 상황을 깊이 개진하여 당시의 금기 사항을 돌아보지 않았으므로
권세를 휘두르던 재상이 미워하였다. 또한 그 동류 중에 공을 쳐서 제거하려는 자가
있었으나 공이 조금도 동요하지 않자 결국 감히 가해하지 못하였다. 겨울에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정사를 처결하면서 청렴을 권장하고 혼탁한 풍조를 없애 온
도내가 엄숙해졌으며, 다시 돌아와 형조 참의가 되었다. 무신년 겨울에 충주목사에
제수되었고 대부인의 상을 당했다. 상제를 마친 뒤에 대사성이 되었는데 이 당시
정인홍이 간신 이이첨과 함께 모사하여 소장을 울려 퇴계 선생을 문묘에 종사해서는
안 된다고 공격하자, 유생들이 모두 분개하여 인홍을 유적에서 삭제하였다. 그런데
그의 무리인 박여량이 그 사실을 들추어 아뢰자 폐주가 진노하여 그 논의를 주도한
자를 조사해 죄를 주려고 하니, 제생이 앞을 다투어 옥에 갇히겠다고 청하고서
성균관을 비우고 나가버렸다. 공은 요속(僚屬)들을 인솔하여 유생들은 예로써
불러야지 위세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고 극구 말하였으나 폐주는 따르지 않았다.
공은 다시 봉사를 올리려고 하던 중 미처 올리기 전에 예조참의로 체직되자, 조정에
있는 것이 싫어서 자청하여 나주목사가 되었다. 나주는 호남의 제일가는 도회처로서
다스리기 어렵다고 소문이 난 곳인데, 고을의 사대부들이 각기 당을 세워 서로
배척함으로써 유감과 원한이 쌓여 원수간으로 변해 그대로 수십 년이 되었으나
관가에서 제어하지 못하였다. 공은 부임하자마자 그 고을의 장로를 불러다가
타이르고 우선 규율을 세운 뒤에 고을에서 준수한 선비를 뽑아 교화시키고 다듬어
인재를 만들고 글을 가르쳐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었으므로 공이 일생을 마칠
때까지 토호가 잠잠하고 유업이 크게 일어나 엄중ㆍ직하와 같은 칭송이 있었다.
계축년(1613) 여름 이첨 등이 모후를 폐위할 계획으로 큰 옥사를 일으켜 선조의
노신들이 거의 일망타진되었고, 공의 아우 금계공과 흠(欽)도 체포되었다. 얼마 후에
그 화가 공에게까지 파급되어 심리에 부쳐져서 공초에 응하였는데 갑자기 중풍이
나 들것에 실려 나왔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침체되어 있다가 천계 임술년(1622)
가을에 끝내 일어나지 못했으니, 향년 59세였다. 9월 병오일에 양주 금촌 사좌(巳坐)
의 자리에 장사지냈으며, 호성공신으로서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공의
부인 신씨는 고령의 대성으로 동지중추부사 발(撥)의 따님인데, 진실하고 청순하며
조촐하고 안존하여 내조를 잘 하였다. 정부인에 봉해졌다.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
호(濠)는 남평현감으로 부인은 흠(欽)의 딸로서 2남 2녀를 두었고, 계배는 윤헌민의
딸이다. 그 다음 황(潢)은 사간원정언으로 대사간 홍서봉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낳았다. 그 다음 정(渟)은 목사 송일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다. 장녀는 사간원
헌납을 지낸 윤순지에게 시집갔다. 차녀는 예조좌랑을 지낸 이행원에게 시집갔고,
1녀를 두었다. 호의 딸은 진사 이수인에게 시집갔고, 아들은 세모이며, 나머지는
다 어리다. 공은 겉모양은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나 풍채가 옹골차고 원대하며
도량이 크고 넓었다. 솔직하고 천진스러워 어떠한 한계가 보이지 않았고, 의기가
드높아서 금석처럼 확고하였으며, 침묵을 견지하여 함부로 담소하지 않았으나
마음이 서로 맞는 자에게는 한번 마음을 주면 변치 않았다. 부모 형제간에 효우는
천성적으로 타고나 꾸며서 할 필요가 없었고, 친족간에 화목한 것은 자연적으로
우러나 그에 미칠 자가 없었다. 남의 선을 선으로 여기는 것은 잘 하고, 남의
악을 미워하는 데에는 소질이 없었으며, 자기 자신을 경계하는 것은 치밀하고,
남들에 대해서는 관대하였다. 남들은 마음을 갖고 애써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을
공은 일상적으로 생활화하여 여유만만하였고, 세속에서 지혜를 짜 권모술수를
부려 스스로 재주가 있다고 여기는 것을 공은 비천하게 여겨, 행여 때가 묻을 듯이
멀리하였으니, 옛사람이 이른바 태평하고 온화하여 덕이 높은 군자가 아니겠는가.
공의 선대는 명망과 덕을 대대로 이어왔다. 야천공은 바른 도와 굳은 절개에다
학문을 겸비하였는데 소인의 배척을 받아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으나, 그 법도가
남아 있고, 가정 교훈이 폐해지지 않아 공의 제부들이 다 독실한 행실이 있었다.
의인왕후가 하늘의 명을 받아 일국의 국모가 되자 반성군이 부원군으로 봉해지고
여러 종자제가 영달하여 줄줄이 관직을 가졌는데, 공은 그 사이에 처하여 진실되고
삼가는 마음으로 담담하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냈으므로 한 집안의 노소가 다
공을 표준으로 삼았다. 공은 문장에 힘을 들이지 않았으나 의취가 본디 높았고,
제반 전적을 섭렵하였는데 단번에 몇 줄씩 읽어 내려갔다. 경사백가에서부터 명
나라와 국조의 제도, 역사 사실이며 인물의 출처에 대해서까지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고, 능히 그 시비를 판가름하였으므로 아무리 고사에 밝은 박사라도 미치지
못하였다. 어제 문자를 맡아 지을 때는 화려하면서도 전중하고, 시를 지을 때는
맑고 산뜻하여 법도가 있었다. 물러나 고향에서 살 때에 오성 이공도 동교에서
지내며 수시로 내왕하였다. 이공이 귀양갈 때 공은 절구 한 수를 지어 증정하기를
“평생에 지닌 죽여의로 자릉대에서 그댈 보내네”하였는데, 이는 사고(謝暖)가 문산
(文山)을 보낸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서 구사한 말이 처절하고 감동에 겨워 사람들이
다투어 전송하였다. 공이 작고했을 때 흠이 제문을 지었는데 그 내용 속에
“참으로 질박한 것은 꾸밈없이 원만하고 성실한 법인데 공은 그 전부를 타고났고,
매우 화기로운 것은 순수하고 평탄하며 크고 너그러운 법인데 공은 그 진수를 지녔다.
이름은 높아지는 데에 관심이 없이 내실을 기하려 했고, 행실은 겉을 꾸미는 데에
관심이 없이 진실되게 하려 했고, 언어는 달변에 관심이 없이 바르게 하려 했고,
재주는 민첩한 것에 관심이 없이 신중히 하려 했으며, 속에 비단 옷을 입고서 행여
그 문채가 드러날까 꺼려하였고, 청렴함을 간직하고서 행여 그 자질이 더러워질까
두려워하였다. 공순한 만석의 풍치이고 침중한 양원(陽元)의 법도였다.” 하였다.
아, 이 말은 과장한 것이 아니니 어찌 후세에 진정으로 알아주는 자가 없겠는가.
공을 아는 사람이 나만한 자가 없고 보면 공의 신도비에 새길 글을 어찌 감히 짓지
않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고금 인물 다르다고 사람들이 말하지만,
공 같은 이 그 어찌 옛 현인들보다 못하겠는가.
공의 벗이 명을 지어, 이 신도를 빛낸다네.
숭정기원후 67년 갑술 12월 일 세움

贈吏曹參判行黃海道觀察使朴公神道碑銘
有明朝鮮 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 経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
館提學藝文館提學 世子左副賓客行通政大夫守黃海道觀察使兼兵馬使
軍節度使朴公神道碑銘 並書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経筵弘文館 藝文館春秋館觀象監
事 世子師申欽 撰
族曾孫通訓大夫行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泰維 書
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兼五衛都摠府都摠管閔維重 篆
欽結髮游學長安中所與交皆一時勝流或以行或以才或以文通籍見所長爲名
士大夫而若論洪磅之器渾成之德澄之不淸撓之不濁衒飾者遇之失其能談
藝者遇之失其華卽靡不歸讓於朴公說之說之名東說號南郭其始自出新羅羅
王之裔散居羅州者爲潘南之朴麗李右文館提學尙衷以直節著入 本朝
左議政錦川府院君壻以勳業聞公八代祖也曾祖曰兆年吏曹正郞 贈左贊成
祖曰紹司諫院司諫贈領議政嘗言金安老奸不可復用被佑遯于嶺南以卒
號冶川考曰應福大司憲 贈潘川府院君騙曰林氏善山望閥別坐九齡之女以
嘉靖甲子生公其稚也萄萄超倫五歲知讀書外似朴訥而中實聰穎記誦捷敏
同塾者莫之先諸父潘城南逸兩公尤重公期以遠大惟恐早得名稍長諭辭居業
文藻日進辛巳中漢城試乙酉中司馬入大學諸生嚮風景慕不驕如鸞鳳之先
覩己丑鄭賊汝立出於縉紳波及者多朝議日激泮儒亦上章人皆討慄及公赴疏
相與賀曰可無憂矣公果調適其際得無他甲午擢庭試狀元授成均館典籍俄
拜司諫院正言有一舊相在謫圖復用其族兄長諫地將追論鄭松江澈以虐一時
士流爲舊相地公陳其誣與時左遞爲兵曹佐郞分司海州扈 中殿乙未還
朝丙申拜禮曹正郞以接伴使從事官葯還又以御史巡按北道丁酉由騎省出爲
寧邊判官數年中不能一日安於 朝蓋爲醜正者所陰煇也 天兵再出分民
轉餉計口迭休未嘗愆期民力不竭井落晏如戊戌丁外艱庚子服局拜侍講院司
書辛丑拜弘文館修撰校理歷文學持平除吏曹佐郞陞正郞秋以遠接使從事
官往義州以親瑀遞壬寅拜檢詳舍人轉司成相禮通禮未幾加通政階授黃州牧
使黃當西門孔道稱岩邑値大民賦較大小量近遠立限制和均若妓一民戶不
病官用常饒務爲經遠不察察苛細百爲俱擧政淸訟息故老傳誦謂百年來無此
良牧云繡衣以異績聞 錫表裏嘉之爪滿入爲禮曹參議承政院同副承旨序
陞右副對馬島倭以家康之說來求和取二卒送之曰此壬辰犯 陵賊也時權相
當國欲自爲功將告 廟獻層公上疏言狡賊變詐如逮到京中事無其實則爲
賊所瞞貽譏後世請斬之境上逆折其奸 宣廟命諸宰雜議唯鰲城李公議與公
合竟械來鞫之無驗人乃服公先見天旱求言公代撰極陳危亂之形不避諱忌
權相惡之其類有欲擊去公者公不少撓卒亦不敢加冬拜黃海道觀察使攬陂視
事奬廉祛汚一路肅然還拜刑曹參議戊申冬拜忠州牧使遭大夫人憂制除拜
大司成鄭仁弘方與奸臣李爾瞻同事上章攻退溪先生不當從祀文廟多士齊憤
削仁弘儒籍其徒朴汝樑癩奏之廢主震怒欲拷其倡議者抵罪諸生爭請囚空
館而去公率僚屬極言多士可以禮召不可威治廢主不從公將再進封事未上遞
拜禮曹參議公不樂在 朝求爲羅州牧使羅爲湖南一都會稱難治鄕之士大
夫樹黨相傾憾忿膿昇輒成仇敵積數十年官不能制公下車招長老諭之先立表
率選邑中悛士風礪作成敎課無虛日終公之世齊減帖息儒業大興蔚有淹中
稷下之聲癸丑夏爾瞻等謀廢 母后起大獄 先朝耆舊殆空於 一網公之弟錦
溪公及欽被繫俄連逮公下理就供猝中風落出自是坐廢者十年天啓壬戌秋
竟不起享年五十九九月丙午葬于楊州金村巳坐之原以扈 聖從勳 贈嘉善
大夫吏曹參判公夫人申氏高靈大姓同知中樞府事撥之女誠純貞靜克內相
封貞夫人擧三男二女男長濠南平縣監初娶欽之女有二男二女後娶尹獻民女
次曰璜司諫院正言娶大司諫洪瑞鳳女生四男次曰渟娶牧使宋馹女有
一男女長尹順之司諫院獻納次李行遠禮曹佐郞有一女南平之女曰李壽仁進
士男曰世模餘皆幼公貌不踰中人而符彩凝遠宇量恢弘任眞坦率不見畛域
而義氣激冷確乎金石沈默自持不妄言笑而心所契合然諾無貳孝友根於天稟
而不假修爲敦睦出於自然而人莫能及善善長而惡惡短飭己周而遇物恕人
所矜持力行而所未能者公則日用而沛然有餘世所智巧慟摩而自爲工者公則
糠秕而處之若雀古所謂恬穆長德君子者非耶公之家世名德相承冶川公
直道勁節輔以問學而被宵人敲拒而終而典刑所存庭訓不替公之諸父皆有篤
行及 懿仁王后受命母臨潘城有褒紀之封群從子弟簪紳毁赫而公處其間罐
肫栗栗居沖守澹隨遇無壟一門少長咸以公爲標準公不力於文而詞致素高涉
獵典墳一下數行自經史百家以至 皇明 國朝典章故實人物出處無微不
涉而能折其衷雖博士掌故莫及焉其當製誥華而能典爲詩淸新有法廢居松楸
鼇城李公亦屛迹東郊嘗來往方羊李公之竄也公贈小絶曰平生竹如意相送
子陵臺蓋用謝暖送文山事也措語悽激人爭傳之公之歿也欽妖之矣有曰太樸
之眞混融敦蔯公稟其全至和之精粹夷宏厚公得其沖名不必隆要之以實行
不必華要之以惇言不必給要之以直才不必捷要之以重衣錦而惡其文之著也
蘊素而懼其質之釉也恂恂萬石之風默默陽元之度噫言非當也豈無朝暮遇
者知公者莫如欽銘公之神道欽何敢不文銘曰 世嘗謂古今人不相及 如公
者何遜於古賢 有友銘公賁柴新阡
崇禎紀元後六十七年甲戌十二月 日 立

증이조참판행황해도관찰사박공신도비명(전액)
유명조선 증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 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홍문
관제학예문관제학 세자좌부빈객행통정대부수황해도관찰사겸병마사
군절도사박공신도비명 병서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
사 세자사신흠 찬
족증손통훈대부행예문관검열겸춘추관기사관태유 서
보국숭록대부령돈녕부사겸오위도총부도총관민 유중 전
흠결발유학장안중소여교개일시승류혹이행혹이
재혹이문통적견소장위명사대부이약론홍방지기
혼성지덕징지불청요지불탁현식자우지실기능담
예자우지실기화즉미불귀양어박공열지열지명동
열호남곽기시자출신나라왕지예산거나주자위반
남지박려이우문관제학상충이직절저입 본조
좌의정금천부원군서이훈업문공팔대조야증조왈
조년이조정랑 증좌찬성조왈소사간원사간 증
영의정상언김안로간불가복용피우둔우영남이졸
호야천고왈응복대사헌 증반천부원군편왈임씨선
산망벌별좌구령지녀이가정갑자생공기치야도도
초륜오세지독서외사박눌이중실총영기송첩민
동숙자막지선제부반성남일량공우중공기이원대
유공조득명초장유사거업문조일진신사중한성시
을유중사마입대학제생향풍경모불교여란봉지선
도기축정적여립출어진신파급자다조의일격반유
역상장인개토률급공부소상여하왈가무우의공과
조적기제득무타갑오탁정시상원수성균관전적아
배사간원정언유일구상재적도복용기족형장간지
장추론정송강철이학일시사류위구상지공진기무
여시좌체위병조좌랑분사해주호 중전을미환
조병신배례조정랑이접반사종사관약환우이어사
순안북도정유유기성출위녕변판관수년중불능일
일안어 조개위추정자소음휘야 천병재출분민
전향계구질휴미상건기민력불갈정락안여무술정
외간경자복국배시강원사서신축배홍문관수찬교
리력문학지평제이조좌랑승정랑추이원접사종사
관왕의주이친우체임인배검상사인전사성상례통
례미기가통정계수황주목사황당서문공도칭암읍
치대민부교대소량근원립한제화균약기일민호불
병관용상요무위경원불찰찰가세백위구거정청
송식고로전송위백년래무차량목운수의이이적문
석표리가지조만입위례조참의승정원동부승지서
승우부대마도왜이가강지열래구화취이졸송지왈
차임진범 릉적야시권상당국욕자위공장고 묘헌
층공상소언교적변사여체도경중사무기실칙위
적소만이기후세청참지경상역절기간 선묘명제
재잡의유오성이공의여공합경계래국지무험인내
복공선견천한구언공대찬극진위란지형불피휘기
권상악지기류유욕격거공자공불소요졸역불감가
동배황해도관찰사람피시사장렴거오일로숙연환
배형조참의무신동배충주목사조대부인우제제배
대사성정인홍방여간신이이첨동사상장공퇴계선
생부당종사문묘다사제분삭인홍유적기도박여량
나주지폐주진노욕고기창의자저죄제생쟁청수공
관이거공솔료속극언다사가이례소불가위치폐주
부종공장재진봉사미상체배례조참의공불악재
조구위나주목사나위호남일도회칭난치향지사대
부수당상경감분농승첩성구적적수십년관불능제
공하차초장로유지선립표솔선읍중전사풍려작성
교과무허일종공지세제감첩식유업대흥울유엄중
직하지성계축하이첨등모폐 모후기대옥 선조기
구태공어일망공지제금계공급흠피계아련체공하
리취공졸중풍락출자시좌폐자십년천계임술추
경불기향년오십구구월병오장우양주금촌사좌지
원이호 성종훈 증가선대부이조참판공부인신
씨고영대성동지중추부사발지녀성순정정극내상
봉정부인거삼남이녀남장호남평현감초취흠지녀
유이남이녀후취윤헌민녀차왈황사간원정언취
대사간홍서봉녀생사남차왈정취목사송일녀유
일남녀장윤순지사간원헌납차이행원례조좌랑유
일녀남평지녀왈이수인진사남왈세모여개유공모
불유중인이부채응원우량회홍임진탄솔불견진역
이의기격냉확호김석침묵자지불망언소이심소계
합연낙무이효우근어천품이불가수위돈목출어자
연이인막능급선선장이악악단칙기주이우물서인
소긍지력행이소미능자공칙일용이패연유여세소
지교통마이자위공자공칙강비이처지약작고소위
념목장덕군자자비야공지가세명덕상승야천공직
도경절보이문학이피소인고거이종이전형소존정
훈불체공지제부개유독행급 의인왕후수명모림
반성유포기지봉군종자제잠신훼혁이공처기간관
돈률률거충수담수우무롱일문소장함이공위표준
공불력어문이사치소고섭렵전분일하수행자경사
백가이지 황명 국조전장고실인물출처무미불
섭이능절기충수박사장고막급언기당제고화이능
전위시청신유법폐거송추오성이공역병적동교상
래왕방양이공지찬야공증소절왈평생죽여의상송
자릉대개용사난송문산사야조어처격인쟁전지공
지몰야흠요지의유왈태박지진혼융돈진공품기전
지화지정수이굉후공득기충명불필륭요지이실행
불필화요지이돈언불필급요지이직재불필첩요지
이중의금이악기문지저야온소이구기질지유야순
순만석지풍묵묵양원지도희언비당야기무조모우
자지공자막여흠명공지신도흠하감불문명왈
세상위고금인불상급 여공자하손어고현
유우명공 분시신천
숭정기원후육십칠년갑술십이월 일 립





방문자 집계

오늘
1,584
어제
2,734
최대
3,242
전체
1,300,385

영암문화원 열람실 | 대표자 : 원장 김한남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교동로55

TEL : 061-473-2632 | FAX : 061-473-2732 | E-mail : [email protected]

Copyright © 영암문화원. All rights reserved.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