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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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금석문 학산면

병조참판 최치헌 신도비

주  소
학산면 독천리 산 94-1
건립연대
530년 중광작약 3월(경신 1920년) *최치헌 : 1773~184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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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선대부 행 병조참판 해주최공 신도비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가선대부 행 병조참판 통훈대부 사간원 헌납 해주 최공 치헌(致
憲) 신도비
친족 증손인 통정대부 비서원 승 창보(昌溥)가 삼가 지었고, 성산 현재승(玄在升)이 씀.
공의 휘는 치헌(致憲), 자는 내원(乃元), 호가 성재(醒齋)이다. 우리 해주최씨는 고려 태사
문헌공 최충(崔冲) 공을 시조로 한다. 문화공(文和公) 유선(惟善), 양평공(良平公) 사재(思
齊), 문청공(文淸公) 자(滋), 충헌공(忠憲公) 유엄(有渰) 등 대대로 이름난 덕과 문학으로
현달하였으니, 사적이 <고려사 8>에 실려있다. 본조에서는 하(荷) 공이 소윤을 지냈고,
하 공이 부제학을 지낸 만리 공을 낳았으니, 만리 공은 경술(經術)로 영릉(英陵, 세종)
을 보필하여 군왕의 지혜를 깨우쳐 준 경우가 많았다. 만리 공이 연(堧) 공을 낳았으니
전한을 지냈다. 연 공이 세걸 공을 낳았으니 헌납을 지냈으며, 직언으로 무오년의 화를
입었다. 세걸 공이 응(凝) 공을 낳았으니 현감이며, 응 공이 수인(守仁) 공을 낳았으니
병사를 지냈다. 병사 공이 경창 공을 낳았으니, 호가 고죽이고 문무의 재목이었으나
시대의 우환을 당하여 부사에서 벼슬을 그만두었으니, 율곡(栗谷) 이문성(李文成) 선생이
칭송하기를 빙상소리(氷霜素履, 고초에도 길을 바꾸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부사 공이 집 공을 낳으니, 좌랑을 지냈고, 판서에 증직되었고, 호는 만취(晩翠)이다.
판서 공이 진해 공을 낳았으니, 군수를 지냈으며, 찬성에 증직되었으며, 호는 역촌(
櫟村)으로 일찍이 과거를 폐하고 광해군 때에는 신독재(愼獨齋) 김 문경공(文敬公)과
도의로 사귀었다. 찬성 공이 석징 공을 낳았으니, 공은 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청렴하고
검박함으로 몸을 다스렸고, 은거하며 자적하며 살다가 처음 낭산 구림에 기거하기
시작하였다. 참판 공이 인서 공을 낳았으니, 통덕랑을 지냈고, 효도로 칭송되었으니, 이
분이 공의 고조가 된다.
증조부는 휘가 상주로 사복시 정에 증직되었고, 조부는 휘가 명흥이니 좌승지에
증직되었으며, 부친은 휘가 수덕으로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3대에 걸쳐 증직된 것은
공이 귀해졌기 때문이다. 대대로 문장과 행실이 독실하여 청빈에 스스로 힘썼다. 처인
정부인 전의이씨는 의민(義敏)의 따님으로 석탄(石灘) 문정공 신의(愼儀)의 6세손이다.
처음 참판공의 3종제인 학생공(學生公) 수민(粹民)이 함양박씨 창후(昌垕)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네 아들을 낳았는데, 공은 그 셋째로 출계하여 참판공의 뒤를 이었다.
치헌 공은 영조 계사년 12월 14일생으로 어려서부터 행실이 간결하고 과묵하였으며, 덕의
그릇이 일찍 성취하게 되었다. 이씨 부인께서는 성품이 엄숙하고 법도가 있었으므로, 비록
심히 사랑하더라도 가르칠 때는 반드시 원칙대로 하였다. 공이 학문을 익히게 되자 문예가
날로 일취월장하여 경전의 뜻을 해석할 줄 알았고, 조금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집안이
빈한하였으므로 매일 가난하게 살았는데, 이른 아침에 부지런히 일어나 봉양하는데
빠짐이 없었으니, 이웃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순조 병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당에 들었고, 신사년에 6품이 되었으며, 성균관 전적,
종부시 주부,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였으며, 경차관으로 나아가 호서 지역의 재해 입은
고을을 시찰하였다.
소를 올려 인심을 얻는 요체에 대하여 아뢰었고,후한 비답을 받았으며, 대동찰방으로
나갔다가 경기도사를 역임하고 돌아와 사간원 정언, 헌납, 사헌부 장령, 성균관 직강에
제수되었다.
계사년에 보령현감으로 나아갔는데 흉년이 들자 진휼할 것을 청하였고, 성문 안이
편안하게 되었다. 병신년에는 양사의 아장(亞長, 사헌부의 집의와 사간원의 사간)이
되었으며, 정유년에는 통정대부로 승차하였고, 돈녕부 도정에 제수되었으며, 승정원에
들어가 동부승지가 되었고, 승진하여 좌우승지가 되었다. 임인년에는 가선 품계로
승진하였고, 한성부 좌, 우윤에 제수되었고, 병조참판이 되었으며, 이듬해 사직소를 올려
향리로 돌아왔다.
헌종 을사년 6월 21일에 집에서 졸하였다. 8월 마지막 모갑일(某甲日)에 영암군 서쪽 웅암
(熊巖) 선영 포곤 자리에 장사지냈다. 배위는 정부인 하동정씨로 상곤의 따님인데, 한림을
지낸 어은(漁隱) 정서(鄭鋤)의 후손이다. 인자하시며 정숙하여 완온한 덕으로 어김이
없었다. 공보다 3년 먼저 별세하시니 처음에는 군 서쪽 지종리에 장사지냈다가, 공의
장례에 이르러 여기에 옮겨 합봉하였다.
네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은 찬(瓚), 차남은 관(瓘)으로 모두 통덕랑이었고, 덕행과
문장으로 세상에 거론되었다. 다음으로 전(琠)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이 되었으며, 다음
기(璣)는 통덕랑이니 은거하면서 주자를 존숭하였고 청렴하여 스스로 수양하였다. 찬(瓚)
의 아들은 효석(孝錫)이니 통사랑이었으며, 딸은 윤관하(尹觀夏)에게 시집갔다. 관(瓘)의
양자는 인석(寅錫)이며 딸은 이유태(李儒泰)에게 시집갔다. 전의 아들은 항석(恒錫)이고,
딸은 류석철(柳錫喆)에게 시집갔으며, 기의 아들 실석(實錫)은 양자로 나갔고, 돈석(敦錫),
경석(敬錫)이 있다. 증손 항렬로는 익보(益溥), 필보(弼溥), 순보(順溥), 선보(宣溥), 학보(
學溥), 정보(靖溥), 일보(一溥), 관보(觀溥), 항보(亢溥)가 있고, 증손녀는 박승엽(朴勝曄),
김락호(金樂鎬), 유성연(柳性淵), 박균양(朴均陽), 임형상(林亨相), 임현규(林玄圭), 박정현
(朴定鉉), 민병룡(閔丙龍), 박건양(朴建陽)에게 시집갔다.
현손 항렬로 남자는 병만(秉晩), 병량(秉亮), 병용(秉容), 병술(秉述), 병율(秉律), 병희(秉
喜), 병준(秉駿), 병선(秉善), 병문(秉文), 병태(秉鮐), 병두(秉斗), 병주(秉周), 병교(秉交),
병규(秉規), 병구(秉矩)가 있다. 현손 여자 항렬들은 이민룡(李敏龍), 윤재득(尹在得)에게
시집갔다. 5대손은 홍섭(洪燮), 구섭(九燮), 용섭(龍變)이다.
공은 청렴함으로 이름을 날렸고, 풍모와 정신이 빼어났으며, 성정이 본래 자애롭고 진실
되었고, 본성을 성심으로 지키고 강직함으로 마름질하였다. 그가 집에 있을 때 위로
받들고 아래로 접대하는 것이 정성에서 나왔으며, 스스로는 검약하여 사치는 배격하였다.
유감스러운 일을 당하면 은혜를 베풀었고, 맡은 일은 각각 책임져서 이루었다.
관직 생활을 할 때는 위엄으로 은혜를 마름질하였고, 인정(人情)을 따르는데 힘썼고,
이속은 간사한 자를 용납하지 않았고, 백성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닿게 하였다. 임하는
곳마다 모두 떠나간 뒤에 공을 그리워하여 비석을 세워 칭송하였다. 군주를 섬김에
있어서는 강직함을 위주로 하였으니, 승정원에 있을 때 왕에게 잘못이 있으면 바로잡았고,
상약(嘗藥)을 지니고 서서 연달아 닷새를 지내도 해이하지 않아서 성상의 포상을
얻기도 하였다. 입조한 27년 동안 힘을 다하여 봉공(奉公)하였고, 기어이 군은(君恩)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부모를 모심에 있어서는 봉양하고 추모함에 있어서 각각 그 성심을
다하였고, 전후의 상례에 있어서는 제도를 따라 유지하였으되, 인정과 예의를 모두
갖추었다. 이것으로 공이 한 일의 만분의 일이라도 상상할 수
있으니, 당시 여러 사람은 공의 빛나는 모습과 맑은 기풍에
탄복하고 칭찬하며 경탄하였다.
조정에서 치제문(致祭文)이 내려왔다. 공은 만사(挽詞)의
문장으로 이름이 크게 났는데, 더욱 백세 후를 경계하고자
하였다. 지금 공의 현손인 병만(秉晩) 군이 그 종조부인 돈석
(敦錫) 씨가 글을 지어 나에게 명문을 청하였다고 하니, 나는
원컨대 문장이 좋지 않으므로 정말이지 그 덕의 빛남을 드날릴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 집안은 대대로 도탑고 화목하게 지낸 지
오래되었고, 의리상 사양할 수 없으니 삼가 뽑아서 기술하였다.
이어서 명(銘)을 지었으니, 명(銘)은 다음과 같다.
아아 찬란한 문헌공이여 비로소 우리 집안을 크게 하였도다.
우리 도가 바로 동쪽에 있으니 호상(湖庠)이 용납하기 어려웠지.
고려 때부터 대대로 명족이라 군왕을 보좌했으니, 부제학 만리
공 대에는 우리 세종대왕을 보좌하였노라.
고죽 공은 완전한 재질로도 벼슬살이는 고달팠으나
온갖 고초에도 본분 지켰으니 율곡 선생이 칭찬한 바로다.
역촌은 과거 공부 폐하고 단단히 자신을 지켰네.
권간(權奸)과는 멀어지고 유종(儒宗)과는 벗 되었도다.
양파공께서는 남쪽으로 돌아와 텃밭두고 살면서 몇 대를 은사로
살았으니,
청고(淸苦)함을 업으로 여기고 살았네.
공은 그것을 이어받아 능히 그 조상을 닮으려 하였노라.
부모를 모심에 못하는 일이 없고, 경전에 힘써서 무성하게
되었도다.
영명한 왕정에서 강직하고 강직한 말로 의논했고,
재난 입은 백성들 소생시킬 줄 알았고, 굶주린 고을에서는
정치를 칭찬하였노라.
가까이에서 왕을 모실 때는 상약을 지녔고, 왕의 포상도
받았다네.
늦게야 이경(貳卿)의 지위에 이르렀고, 존귀한 자리에 3년을
있었도다.
물러나서는 자연에 머물렀으니 낭산 어딘가였네.
군자가 세상을 떠남에 조화를 바라봄이 어째서 슬프랴?
웅암의 기슭은 맑은 기운 쌓인 곳이라네.
의관 모두 보관하여 영원히 닫친 무덤 되었네.
내 명에는 꾸밈이 없지만, 그것으로 수백 년을 거듭하려 하노라.
530년 신유[重光作噩] 3월 세움

嘉善大夫行兵曹叅判海州崔公神道碑
有明朝鮮國嘉善大夫行兵曹叅判通訓大夫司諫院獻納海州崔公致憲神道

族曾孫通政大夫秘書院丞昌溥謹撰
星山玄在升書
公諱致憲字乃元號醒齋我海州之崔以高麗太師文憲公諱冲爲上祖若文和
公諱惟善良平公諱思
齊文淸公諱滋忠憲公諱有渰世以名德文學顯事載麗史八 本朝有諱荷少
尹生副提學諱萬理以
經術仕 英陵啓沃弘多生諱堧典翰生諱世傑獻納以直言罹戊午之禍生諱
凝縣監生諱守仁兵使
生諱慶昌號孤竹以文武全材阨于時仕止府使栗谷李文成先生稱之以氷霜
素履府使生諱潗佐郞
贈判書號晩翠判書生諱振海郡守 贈贊成號櫟村嘗廢擧光海時與愼齋金
文敬公爲道義交贊
成生諱碩徵 贈叅判淸儉律身優閒自適始居朗山之鳩林叅判生諱麟瑞通
德郞以孝稱寔公高祖
也曾祖諱尙周 贈司僕寺正祖諱命興 贈左承旨考諱粹德 贈戶曹叅判三
世貤贈以公貴也世
篤文行淸苦自勵妣貞夫人全義李氏義敏女石灘文貞公愼儀六世孫也始叅
判公緦弟學生公諱粹
民娶于咸陽朴氏昌垕女生四子公其弟三子而出爲叅判公後公以 英廟癸
巳十二月十四日生自
幼簡黙德器夙就李夫人性嚴有法度雖甚愛而敎必以義方及就學文藝日進
紬繹經旨未嘗少懈家
素貧每値屢空而夙夜服勤奉養无闕隣里咸稱之 純祖丙子中文科入堂后
辛巳陞六品歷成均館
典籍宗簿寺主簿司憲府持平以敬差官出按湖西灾傷邑䟽陳任官得人之要
承 優批間出爲大同
察訪京畿都事還拜司諫院正言獻納司憲府掌令成均館直講癸巳出爲保寧
縣監値歲侵啓請賑救
闔境頼安丙申入爲兩司亞長丁酉陞通政拜敦寧府都正入承政院爲同副承
旨陞至左右承旨壬寅
進嘉善階歷拜漢城府左右尹兵曹叅判翌年陳䟽解官歸鄕里以 憲宗乙巳
六月二十一日卒于家
八月某甲葬于靈巖郡西熊巖先兆抱坤之原配貞夫人河東鄭氏相坤女翰林
漁隱鋤之後也慈仁貞
靜媲德無違先公三年卒初葬郡西池宗里及公之葬遷而祔焉生四男長瓚次
瓘幷通德郞以德行文
藝稱次琠文科司諫次璣通德郞韜光遵晦淸儉自修瓚男孝錫通仕郎女適尹
觀夏瓘系男寅錫女適
李儒泰琠男恒錫女適柳錫喆璣男寅錫出系敦錫敬錫曾孫男益溥弼溥順溥
宣溥學溥靖溥一溥觀
溥亢溥女壻朴勝曄金樂鎬柳性淵朴均陽林亨相林玄圭朴定鉉閔丙龍朴建
陽玄孫男秉晩秉亮秉
容秉述秉律秉喜秉駿秉善秉文秉鮐秉斗秉周秉交秉規秉矩女婿李敏龍尹
在得五世孫洪燮九燮
龍燮公方面淸楊風神秀朗性本慈諒而誠以持之剛以濟之其居家也上承下
接出於悃愊自奉儉約
屛去奢華遇臧獲有恩而分事授職各責其成其居官也威以濟恩務順人情吏
不容奸民蒙實惠所莅
皆去後思立石頌之其事君也直喉院日値王候有諐侍立嘗藥連五晝夜不懈
至蒙 天褒立朝二
十七年竭力奉公期有報效其事親也生養沒哀各盡其誠前後持制情文俱備
此可想像公事行之萬
一而當時諸公以光霽之容淸和之風欽服而稱歎之至於 聖朝致侑之文名
碩挽誄之章尤足以懲
戒於百世矣今公之玄孫秉晩君以其從祖敦錫氏所爲狀請銘於余自顧不文
實無以揄楊其德徽然
念吾家世講敦睦者久矣義不容辭謹撮以叙之系以銘曰
於赫文憲始大吾宗吾道其東湖庠難容爲麗世卿黼黻笙鏞曁于副學佐我
英陵孤竹全才仕蹇命
嶝素履氷霜栗老所稱櫟村廢擧礭有執守權奸是斥儒宗爲友贈公南歸環堵
半畝數世隱德業傳淸
苦公維承之克肖厥祖事親無方劬經有樹蜚英 王庭偘偘言議灾民知蘇蔇
邑稱治侍疾嘗藥 天
褒隆摰晩躋貳卿尊有三達退然林壑朗山一抹君子令終視化何怛熊巖之麓
淑氣攸積衣冠所閟永
安眞宅我銘無華用垂千百 五百三十年重光作噩三月日 竪

가선대부행병조참판해주최공신도비
유명조선국가선대부행병조참판통훈대부사간원헌납해주최공치헌신도비
족증손통정대부비서원승창보근찬
성산현재승서
공휘치헌자내원호성재아해주지최이고려태사
문헌공휘충위상조약문화공휘유선양평공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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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사 영릉계옥홍다생휘연전한생휘세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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