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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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금석문 삼호읍

효자 조씨 부자 사적비

주  소
삼호읍 서창리 17-3
건립연대
계해 4월(1863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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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조씨 부자[趙公兩世] 사적비

효(孝)는 하늘이 내린 본성이라 자식 된 사람이 직분의 당연함으로 실천 해야 한다.
부모의 뜻을 봉양하고, 부모의 구체(口體)를 봉양해야 하니, 병이 나면 근심하고,
상을 당하면 슬퍼하는 절조는 모두 정성을 다하는 것이라. 그러한 뒤에야 부모를
잘 모신다 할 수 있다. 부모를 잘 모시면 여러 행동이 이로부터 완비되므로 ‘효는
백 가지 행동의 근원이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으로 효의 도를 다 하지 않음이
가하겠는가?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추증된 조재철(趙載喆) 공은 한양이 관향으로, 우의정
양경공(良敬公) 연(涓) 공의 선조가 되고,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종건(宗建)과
정부인 김해김씨가 그 아버지와 어머니가 된다.
공의 자는 치인(致仁), 호는 모제(慕齊)이다. 이갈이하는 나이가 되고부터 부모를
모시는 도리를 극진히 하였는데, 잠자리를 돌보는 절조나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조금도 해이함이 없었고, 산에서 과일을 따고 하천에서 고기를 잡아 직접
드렸다. 모친이 병에 걸리자 변을 맛보아 용태를 살폈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약으로 올렸더니, 용태가 저절로 나아졌다. 또 그 부친이 병에 걸리자
점점 위급해져서 꿩고기탕(雉湯)을 먹고 싶다고 하자, 공이 하늘을 바라보고
울부짖어서 후원에 꿩 한 마리가 스스로 날아서 품 안으로 들어왔다. 부친이
그것으로 소생하였다. 10년을 더 모신 끝에 끝내 천명이 끝나게 되니, 슬픔이 몸을
상하고, 예를 어길 정도가 되었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공은 집안이 가난하여 어버이가 늙을 때까지 어떤 학업도 수행하지 못하고,
나무하기 등 생계에 관련된 일을 하느라, 부모를 모시는 도에 대해서 듣지
못했으나 오히려 이처럼 성정을 다했으니, 이것이 하늘이 낸 본성이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공의 차남인 증 충훈부도사 보원(寶元)은 일찍 가훈을 이어받아 ,부모를 모시는
것에도 그 직분을 다하였다. 부모의 병이 효험을 보기 어렵다면 먼저 큰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약에 섞어 올리거나, 열 손가락을 다 찔러 솜으로 가리고 제도를
유지하기를 예와 같이 하였다. 비록 비바람이 부는 밤에라도 묘를 지키고, 시립
하기를 평소와 같이 하였으니, 이것은 하늘의 효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흉년이 들자 약간의 전토(田土)를 팔아 3리 안에서 굶주리는 사람들을 구휼
하였으니, 이것은 효의 도에서 미루어 남에게 미친 사례라 하겠다.
효라는 것은 천리(天理)의 공(公)이고 사람 사람마다 함께하는 것이며, 곧 조씨 한
가문이 서로 전하는 규범이 되기도 하니 아름답고 성대한 것이다!
이미 아버지가 있고 아들이 있다면 또 당연히 그 손자가 있어야 하지만, 먼저 속후(續后)가
없으니 이 세상에 효를 전하도록 함이 끊어질까 겁내니, 이것이 정말이지 천도를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한 지역의 선비가 그 효행에 감응하여 일제히 천양(闡揚)하는 글을 내었다. 단지 증직
받은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끝내 아직 도설(棹楔)의 은전을 받지 못한 경우에도 단지
비석을 세워 후세에 기록이 사라지지 않기만이라도 바라는 것이다.
사인 최종립, 박경섭은 멀리 와서 나에게 문장을 요구하나 나는 붓을 잡지 않았는데, 어찌
그 선행을 함부로 기술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외로운 여생을 돌아보면 항상 풍수지탄의
감정이 간절하고, 공의 효를 듣고 마음에 감응하는 것이 있어서, 그 외람됨을 잊어버리고
그 문장의 내용을 절충하여 많은 사람에게 내보이려 한다.
해는 계해년 1월 하순, 성균관 진사 덕은(德殷) 송철헌(宋哲憲)이 기술하다.
월성(月城) 최종립 씀
간사인(幹事人) 이전서 김석신 조병기 최병륜 박도섭 윤사병 김이견 조병정 임신석
계해(癸亥) 4월 일 세움


孝子趙公兩世事蹟碑
孝天性也爲人子者職分之所當行而如養志養口禮病致憂喪致哀之節無
不殫誠然後方可謂善事父母也善事則百行從此而備故曰孝百行之源也
人而可不盡爲孝之道哉 贈童蒙敎官趙公載喆漢陽人而右議政良敬公
諱涓爲先祖同知中樞府事諱宗建貞夫人金海金氏其考妣也公字致仁號
慕齊自齠齡克盡事親之道定省之節甘旨之供少不懈弛山果川魚懷而供
進至慈親之癠甞糞斷指痛勢自痊又其嚴親之病漸至危谹願食雉湯公仰
天號泣於後園雉自飛八懷中郎供而蘇延壽十年竟以天命終哀毁踰禮三
年侍墓盖公家貧親老未修學業徒事樵牧不得聞事親之道而猶如是盡誠
此其非天性而然歟公次子 贈忠勳府都事寶元早襲庭訓事親亦盡職分
及親病難醫先斷大指出血和葯以進盡刺十指奄至屬纊持制如禮雖風雨
之夜持墓侍立如平日此可謂根天之孝也歲値歉荒斥賣略干田土救恤三
里飢口此則推孝之道而及於人者也夫孝天理之公人人之所共由而便爲
趙氏一門相傳之規猗歟盛哉旣有是父有是子則又當有其孫而姑無續后
使此世傳之孝恐有所絶是固天道無知者也一鄕之士感其孝行齊發闡揚
之狀只有 贈職而竟未蒙棹楔之 典但欲勒石以爲來世不朽士人崔鍾
砬朴景燮遠來要余文余非秉筆安敢述其善行哉顧此孤露餘生恒切風樹

之憾聞公之孝心有所感忘其猥越檃栝其狀以垂千億也峕
昭陽大囦獻泰之下澣成均進士德殷宋哲憲 述
月城崔鍾砬書
幹事人李典緖 金錫信 曺秉琪 崔秉倫 朴道燮 尹士炳 金利見 趙炳正 林愼錫
癸亥四月 日 立

효자조공양세사적비
효천성야위인자자직분지소당행이여양지양구례병치우상치애지절무
불탄성연후방가위선사부모야선사칙백행종차이비고왈효백행지원야
인이가불진위효지도재 증동몽교관조공재철한양인이우의정양경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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