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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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의 금석문 학산면

학천군 김극조 정부인 전씨 묘비

주  소
학산면 매월리 산 7-5
건립연대
공물 90년 서(書) (1680년) *김극조 : 1534~159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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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통훈대부 이성현감 증 순충보조공신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학천군 김공
증 정부인 전씨의 묘

공의 휘는 극조(克祧), 자는 추원(追遠), 김해 사람으로 수로왕(首露王)의
후예이다. 고조부는 휘가 연(鍊)으로 성균관 생원이었다. 증조부는 휘가 응문(
應文)이다. 조부는 휘가 한성(漢城)으로 좌통례(左通禮)에 증직되었다. 부친은
휘가 사종(嗣宗)으로 공조참의(工曹叅議)에 증직되었다. 부인은 임씨로 숙부인에
증직되었으며, 학생인 휘 무(戊)의 따님이다. 가정(嘉靖) 갑오년 5월 15일, 영암의
치소 서쪽 구음평지리(九音坪之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나이 31세에 등과하였다. 처음에는 권관(權管)에 제수되었고, 다음으로는 만호(
萬戶)가 되었으며, 정해년이 되자 처음 광양의 수령으로 임명되었으나, 무자년에
파면되어 향리로 돌아갔고, 경인년에 또 이성의 수령이 되었다.이때 정여립(鄭汝
立)이 복주(伏誅)되고, 이발(李發)의 형제가 그 옥사가 있고 죽었다.
공은 이씨 집안과 인척 관계의 의리가 있었으므로, 광양의 후임 수령이었던
한덕수(韓德脩)가 은밀히 공을 함정에 엮어 자신의 공업을 도모하는 기반으로
삼고자 하였다. 곧 전 도사(都事) 정설(鄭渫)과 채지목(蔡之穆) 박장(朴藏), 박신(朴
藎), 선상덕(宣尙德), 황한(黃漢), 이득춘(李得春), 이경운(李慶雲) 등이 어지러운
말로 무고하며 공이 은밀히 이발을 도우며 한 말이 불측하다고 말하였다.
이에 스스로 이롭게 하기 위해 심리장으로 나아갔으나, 그를 살펴서 혐의가
없으므로 덕수 등은 반좌율(反坐律)에 처해져 모두 형벌을 받았는데, 그 중 채지목
등 7사람은 이로 인하여 죽었다. 한덕수와 정설은 다 죽고 원지에 유배되었으나,
불행히도 공은 출옥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버렸으니, 이때가 신묘년 3월 12
일이고, 공의 나이 58세였다. 거처의 서북쪽 20리쯤에 간좌곤면(艮坐坤面) 위치에
반장하였다.
이후 34년이 지난 갑자년, 공의 장자인 완(完)이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참여하여
3등에 책록되자, 그 위로 3대에게 은혜를 더하게 되었는데, 이때 공에게 순충보조공신(
純忠補祚功臣)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학천군(鶴川君)
이 추증되었다. 공의 신장은 9척으로 눈썹이 넓고 입이 컸으며, 용력이 절륜하여 능히 300
근의 힘을 내는 활을 만작할 수 있었다. 성품도 효성스러워 어머니 임씨를 발인하는 날에
공이 밖에 있어서 부득이하게 영결하지 못했는데, 크게 한스럽게 생각해서 왼손의 무명지
1마디를 잘라서 종신토록 애통해하였다.
첫 부인은 영암 장씨 장명손(張命遜)의 따님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집 뒤편 율동(栗洞)
에 장사지냈다. 후처는 천안전씨로 첨지중추부사 전방필(全邦弼)의 따님이었고, 공보다
18년 뒤에 세상을 떴으니,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두 부인이 모두 증직되었는데, 모두 공의
품질에 따른 것이었다. 전 부인은 2남 2녀를 낳았으나, 아들 둘은 모두 요절하였고, 딸들은
장성하여 각각 사인 김준선(金浚善), 사인 김항(金沆)에게 시집갔다.
후처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곧 완(完)으로 학성군(鶴城君)에 책록되었으며
황해도병마절도사(黃海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둘째는 딸로 무과에 급제하고
첨지중추부사가 된 서희효(徐希孝)에게 시집갔다. 차남은 우(宇)로 무과에 급제하고
경흥부사가 되었다. 학성군은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남은 여수(汝水)로 무과 급제 후
북병사가 되었고, 해성군(海城君)에 책봉되었다. 차남은 여하(汝河)로 충의위(忠義衛)가
되었다. 측실은 모두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여해(汝海)이고, 딸은 도수(都守)를 지낸
유흘연(柳屹然)에게 시집갔다.
부사는 1남을 두었으니 여옥(汝沃)으로 유업(儒業)을 업으로 삼았다. 측실은 모두 1남을
두었으니, 여준(汝浚)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품계가 절충장군(折衝將軍)까지 이르렀으며,
해성군(海城君)에 책봉되었으며, 1남 1녀를 두었으니, 딸은 부사 김익휘(金益輝)에게
시집갔고, 아들 세기(世器)는 무과에 급제하고 수사(水使)가 되었으며, 학림군(鶴林君)
에 봉해졌다. 측실은 모두 6남 3녀를 두었다. 딸 중 첫째는 절충장군 김연석(金衍錫)에
시집갔다. 그 다음 장남 세중(世重)은 무과에 급제하고 품계가 가선대부에 이르렀으며,
차녀는 나욱(羅旭)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병사(兵使) 이종신(李重信)의 첩이 되었다. 차남
세흥(世興), 삼남 세량(世亮)은 무과에 급제하여 첨사(僉使)가 되었고, 사남 세명(世鳴)은
무과에 급제하였고, 그 다음 세평(世枰)은 충의위(忠義衛)에 더해졌고 2남 1녀를 낳았다.
아들 세표(世杓)는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이 되었고, 그 다음 딸은 사인인
최시상(崔時尙)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 아들 세구(世樞)는 무과에 급제했다. 측실은 모두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세주(世柱)이고, 딸은 정운장(丁運長)에게 시집갔다. 여해(
汝海)는 3남 2녀를 낳았으니, 딸 중 장녀는 오달표(吳達標)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무과에
급제한 이여백(李汝柏)에게 시집갔다. 아들은 세회(世晦)와 형정(衡鼎)이다. 여옥은 4남 2
녀를 낳았으니, 장남 세순(世純) 외에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여준은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세장은 무과에 급제하였고, 딸은 윤전미(尹專美)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윤천미(尹天
美)에게 시집갔다.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학림군이 2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명주
(命冑)로 무과에 급제하였고, 차남은 명휘(命徽)인데 일찍 죽었다. 딸은 어리다. 세중의
아들은 명윤(命允)이고, 세량의 아들은 명석(命錫)이다. 선전관 공이 2남을 두었으니,
장남 명훈(命勳)은 일찍 죽었고, 차남은 명희(命熙)이다. 세주의 아들 명도(命燾)는 무과에
급제하였다. 딸은 김선명(金善鳴)에게 시집갔다. 내외의 여러 자손이 70여 인이다. 처음
비석을 세울 때는 자획이 좁고 얄팍하였고 또 상세하고 실질적이었다. 경신년 여러 후손이
비석을 다시 세울 것을 모의하고, 그 뜻을 내 보인지 오래 되었으나, 공께서 세상을 뜬지
90년 만이다. 불초한 자손 여옥이 스스로 적으니, 이를 가지고 쓴다.

行通訓大夫利城縣監 贈純忠補 祚功臣
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
府都摠管鶴川君金公 贈貞夫人全氏之墓
公諱克祧字追遠金海人首露王之後高祖考諱鍊成均生員曾祖考諱應文祖考諱
漢城 贈左通禮考諱嗣宗 贈工曹叅議妣林氏 贈淑夫人學生諱戊之女以嘉
靖甲午五月十五日生公於靈巖治西九音坪之里第年三十一登號榜初調權管次
除萬戶至丁亥始宰光陽戊子罷歸庚寅又宰利城時當鄭送汝立伏誅李承 旨發
兄弟死於其獄之後也公於李有聯家之義故光陽後守韓德脩陰欲夤緣搆陷以爲
圖功彂身之基即與前都事鄭渫及萘之穆朴藏朴藎宣尙德黃漢李得春李慶雲等
舞辭誣告謂公陰助李語不測於是自利就 理按之無驗德脩等抵及坐律俱受刑
之穆以下七人因斃焉德脩與湈則減死流諸遠而不幸公未及出獄而己捐世是辛
卯三月十二日也壽五十八返葬於所居西北二十里許坐艮面坤之原後三十四年
甲子以長子完叅振武元勳三等加 恩三代 贈公純忠補 祚功臣資憲大夫兵
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鶴川君公身長九尺廣眉犬口膂力絶倫
能弓彎三百斤性又孝林夫人屬纊之日公適在外不得永訣大以爲恨斷左矣無名
指一節以寓終身之慟初娶靈巖張氏諱命遜之女早世葬於家後栗洞後娶天安全
氏僉知諱邦弼之女後公十八年而卒就公墓而祔左前後夫人之贈並視公秩前夫
人生二男二女男皆夭女長適士人金浚善次適士人金沆後夫人生二男一女長卽
完封鶴城君行黃海道兵馬節度使次女適武科僉知徐希孝次男宇武科慶興府使
鶴城君生二男長汝水武科北兵使海城君次汝河忠義衛側室具生一男一女男汝
海女適都守柳屹然府使生一男汝沃業儒業側室具生一男汝浚武科階折衝海城
君生一男一女女適府使金益輝男世器武科水使鶴林君側室具生六男三女女長
適折衝金衍錫次男世重武科階嘉善次女適羅旭次爲兵使李重信妾次男世興次
世亮武科僉使次世鳴武科次世枰益忠義衛生二男一女男世杓武科宣 傳官次
女適士人崔時尙次男世樞武科側室具生一男一女男世柱女適丁運長汝海生三
男二女女長適吳達標次適武科李汝柏男世晦衡鼎汝沃生 四 男二女長世純
餘皆幼汝浚生一男二女男世章武科 女長適尹專美次 適尹天美皆武科鶴
林君生二男一女長命冑武科次 命徽早死 女幼世重之子命允世亮之子命錫
宣 傳生二男長命勳早死次命熙世柱之子命燾武科女歸金善鳴內外諸孫七十
餘人初立石字畫褊淺且欠詳實歲在庚申諸孫更謀鐫頑以示久遠去公歿之歲九
十年也不肖孫汝沃自記因書

행통훈대부이성현감 증순충보조공신
자헌대부병조판서겸지의금부사오위도총
부도총관학천군김공증정부인전씨지묘
공휘극조자추원김해인수로왕지후고조고휘련성균생원증조고휘응문조고휘
한성 증좌통례고휘사종 증공조참의비임씨 증숙부인학생휘무지녀이가
정갑오오월십오일생공어영암치서구음평지리제년삼십일등호방초조권관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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